개봉됐는지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마지막 야구 경기’는 50, 60대 연령층에겐 ‘병맛 코미디’(어이없지만, 이상하게 중독성 있는 코미디) 작품이다. 이 영화의 원제는 ‘이퍼스’로 읽히는 ‘Eephus’이다. 야구 용어이다. 일부러 느리게(시속 70~80km) 던지는 커브 볼이다. 우리 식으로 이 영화의 제목을 고치면 ‘아리랑 볼’쯤이 된다. 재밌는 것은,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이퍼스 볼이 그럴듯하게 한 번이라도 제대로 그려지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영화 ‘마지막 야구 경기’는 야구영화이지만 야구 경기가 극적으로 펼쳐지지는 않는, 이상한 스포츠 영화이다. 외야에서 ‘놀멘놀멘’ 하는 중년들, 더그아웃에서 일상의 불만을 투덜투덜 늘어놓거나, 1루에 서 있는 1루수와 베이스 주자가 경기 후 먹으러 갈 메뉴 얘기를 두런거리는 모습 등등을 끈덕지게 보여주는, 느려 터진, 그런데도 안 웃을 수 없게 만드는, 일종의 ‘슬로우 무비’이다. 일반 상업영화와는 서사의 속도가 다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 속도가 리얼하다. 그래서 이게 ‘진짜’라는 느낌을 준다.
‘마지막 야구 경기’는 국내에서의 ‘대접’과 달리 미국 공개 과정에서는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한국의 ‘들꽃영화상’이 벤치마킹한 미국 독립영화상)’에서 존 카사베츠상과 편집상 후보에 올랐던 작품이다. 뉴욕비평가협회로부터 장편 데뷔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우리에겐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요’같은 느낌의 카스 룬드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고 키스 윌리엄 리처즈, 네이트 피셔, 조 카스틸리오네 등등 국내에는 낯설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미국 독립영화 배우들이자 나이 많은 배우들이 줄지어 나오는 영화이다. 특이한 것은 미국 다큐멘터리계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레더릭 와이즈먼이 캐스팅 리스트에 있는데 영화를 복기해 보면 오프닝 시퀀스의 라디오 캐스터 목소리가 바로 와이즈먼임을 알 수가 있다. 프레더릭 와이즈먼은 2026년인 올해 초 타계했으나 세상을 뜨기 전인 2024년에 목소리로만 출연한 이 영화가 그의 유작이 된 셈이다. 그의 목소리로 전해지는 라디오 대본 내용이 이 영화의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한다. 영화는 종종 오프닝에서 모든 걸 보여준다.
“또다시 정각에 찾아온 ‘비포 위 비긴’의 브랜치 모어랜드입니다. 먼저 힐즈버러 카운티 사고 소식입니다. 화물트럭 한 대가 브레이크 고장으로 도로를 이탈했으나 외곽지역인 덕분에 인명 피해는 없었습니다. 주요 뉴스입니다. 동네 개들을 위협하던 코요테 한 마리가 드디어 처단돼 열흘 뒤 할로윈을 편히 보낼 수 있게 됐으니 반려견과 함께 즐기세요. 물론 초콜릿은 주지 마시고요. 점점 쌀쌀해지겠지만 다양한 할로윈 행사가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안타깝게도 올해 캔디콘 빨리 먹기 대회는 사탕을 세어 주던 ‘숫자 세기 신동’이 이사 가는 바람에 열리지 않을 예정입니다. 숫자 세는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투표가 통과되어 3주 안으로 더글러스의 새 중학교 건설공사가 시작됩니다. 힐즈버러 카운티 위원회가 더글러스 중심부의 토지 재개발을 승인해 수년 만에 가장 큰 공사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하나 인근 마을 야구팀의 안방이었던 솔저스 필드가 사라지게 됐습니다. 새 야구장 건설 계획은 아직 알려진 바가 없으며 옆 축구장은 체육 수업에 활용된다고 하네요. 긴 겨울을 앞둔 노스 카운티 학부모들은 이제 럼색 중학교까지 40km가 넘는 거리를 운전하지 않아도 돼서 기쁘겠네요. 많은 학부모들이...(찌지직전파 소리)”
그리고 프래니(클리프 블레이크)가 늙은 몸을 이끌고 접이식 책상과 의자를 끼고 나타나 자리를 잡는다. 그는 스코어 키퍼이다. 곧 솔저스 필드에서 열릴 마지막 야구 경기를 기록하기 위해서이다. 선수들이 한명 한명 등장한다. 건설공사를 책임질 그레이엄(스티븐 라도치아)도 오는데 그는 리버 독스 팀의 리더이자 베이스 코치이기도 하다. 이번 마지막 경기는 리버 독스 대 애들러스 페인트이다. 두 팀 모두 힐즈버러 카운티 안 작은 마을을 대표하는, 일종의 사회인 야구단이다. 애들러스 페인트라는 이름으로도 알 수 있듯이 어느 페인트 회사 소속일 가능성이 크다.
이들 야구는 프로들의 시합과는 거리가 멀다. 일단 9명을 채우지 못한 채 시합을 시작한다. 안 온 사람은 8번으로 배치하고 그래도 안 오면 9번으로 한다는 식이다. 투수를 강판했다가 구원투수로 다시 세우기도 한다. 주심이 6시쯤 자기는 퇴근 시간이 됐다며 야구장을 떠나기도 하고 어느 팀의 1루수는 부심에게 차에 실어놓은 스테이크용 고기를 줄 테니 주심 좀 잡아 보라고 하지만 그는 결국 9달러만 챙긴 채 주심을 따라 줄행랑을 치기도 한다. 리버 독스의 선발 투수는 경기 내내 캔맥주를 마시다가 나중에 외야에서 벌렁 누워 버리기도 한다. 심판은 나중에 기록원인 프래니가 ‘대충’ 맡기로 하는데 중계석에서 내려다보는 그의 눈은 침침하기 이를 데 없어서 공이 타자의 유니폼 글자 위로 왔느냐 밑으로 왔느냐를 가지고 스트라이크와 볼을 구별하기도 한다. 선수들은 밋밋하고 나른한 표정으로 자기 팀의 공격을 바라보는데 꼭 이기겠다는 마음이 있는 건 아니다. 경기 중간쯤 선수 중 한 명인 리치(레이 흐립)가 이런 말을 한다. 동료들이 막 그레이엄에 대해서 뒷담화를 하는 중이었고 리치는 그레이엄이 일종의 배신자라고 말하던 참이다. “(그러니까 오늘의) 이 경기도 전투야. 가게에 가는 것도 전투야. 학교에서 애를 데려오는 것도 전투야. 자궁암 4기로 죽어가는 90세 할머니를 병문안하러 가는 건… 전투가 아냐. (그건) 사랑이지.” 이 대사는 영화 ‘마지막 야구 경기’가 하려는 얘기를 압축해서 다 담아내고 있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거대한 미대륙의 커다란 한 주인 매사추세츠주, 거기서도 작고 작은 마을 더글러스에서 살아 온 ‘쓸모없어 보이는 인간들’ 혹은 ‘루저들’의 궁색하고 비루한 모습을 담아내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약 그랬다면 이 영화는 그렇고 그런 신파 영화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 영화가 의외로 돋보이는 것은 인생이란 원래 스러져 가는 것이고 그래서 쓸모가 없어져 가는 것일 뿐인데, 그 시간의 흐름과 함께 스러져 감의 쓸쓸함을 차분하면서도 다정하게 담아내고 있는 부분 때문이다. 야구장 솔저스 필드처럼 자신들도 사라져 가고 있지만 그거 뭐, 받아들일 수 있으며 받아들여야 한다는 관조적 태도야말로 이 영화가 지닌 미덕이다. 살짝 감동을 주되 괜히 울리려고 하거나 격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야구 경기 자체를 드라마틱하게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러닝타임을 극 중 인물 간의 대사나 독백으로 이어가야 하며 적절한 에피소드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 서사의 창의성이 만만치 않다. 후반에 이르러 MLB의 전설 빌 리를 깜짝 등장시킨다. 1970년대 이퍼스 피칭으로 유명했던, 진짜 투수이다. 빌 리는 더그아웃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선수들 앞에 나타나 누군가 자신을 본 적이 없다고들 하자 “자넨 그때 똥이나 싸는 강아지였으니까”라고 말한다. 그가 “지금도 그래요”라고 대꾸하면 “식단을 바꿔. 섬유질을 많이 먹어.”라고 말해 사람들을 미소 짓게 한다. 그는 계속 말한다. “나랑 뛰던 친구들은 거의 죽었어. 절반은 죽었고 절반은 죽고 싶어 하지. 송장 상태로 돌아다니고 싶어 하지 않거든. 요양원에 가서 볼에 흐른 콧물 닦는 신세가 되고 싶지 않잖아.” 이때의 빌 리의 연기는 그냥 연기가 아니다. 감독이 빌 리에게 진짜 자신의 얘기를 하라고 한 듯이 보인다. 빌 리는 영화에서 딱 한 이닝을 던지고 퇴장한다. ‘슬슬 기어 다니던’, 슬로우 시네마의 정석을 따라가던 이 영화에서 빌 리의 등장은 가장 어색하지만, 가장 진실되고, 가장 재미있으며 가장 울컥하게 만든다. 친구들의 절반은 죽었고 절반은 죽고 싶어 한다. 인생의 진리이다.
영화의 엔딩곡은 톰 웨이츠의 ‘Ol’ 55’이다. ‘올드 피프티 파이브’라고 읽는 노래이며 톰 웨이츠의 대표곡이다. ‘오래된 55년식 자동차’를 말하며 가사에서는 1955년형 캐딜락을 의미한다. “시간은 왜 이리 빨리 가는지, 난 낡은 55년식 차를 타고 번개처럼 달렸지. 해가 뜨고 있고 난 운이 좋은 것 같아. 별들이 지기 시작하네. 조금만 더 머물렀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노랫말이다. 영화 ‘마지막 야구 경기’의 솔저스 필드는 야간경기를 할 수 있는 스타디움 라이트가 켜지지 않는다. 선수들은 마지막 경기를 위해 자신들이 끌고 온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를 이용한다. 경기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그들은 약간 풀이 죽은 상태로 각자의 차를 몰고 경기장을 떠나기 시작한다. 톰 웨이츠의 이 노래는 가장 어울리는 영화를 만난 셈이 됐다. 수작이다. 지난 4월 22일 개봉됐다. 1449명이 봤다. 영화의 질은 꼭 관객 수가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