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열사의 친형이자, 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이다. 박종철 열사가 1987년 1월 경찰 고문으로 세상을 떠난 뒤, 이듬해인 1988년부터 기념사업회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유가족 관련 문제부터 추모사업, 인권사업, 장학사업까지 함께하고 있으며, 2008년에는 사단법인으로 전환됐다. 현재는 매년 인권상 시상도 하고 포럼이나 시민 행사도 개최하고 있다.(약력)
'탁하고 치니 억하고'…스타벅스 논란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시 소환했다.
1987년 1월. 22살 대학생이었던 박종철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 조사를 받다 목숨을 잃었다.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거짓 발표로 사건을 축소하려 했지만, 끝내 드러난 것은 국가 폭력이었다.
물고문과 은폐, 조작은 당시 군사정권의 민낯을 드러냈고, 박종철 열사의 죽음은 결국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시발점이 됐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했고, 한국 사회는 독재 체제를 넘어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거대한 분기점을 맞았다.
박종철이라는 이름은 단지 한 청년의 비극이 아닌 한국 현대사가 올바른 민주주의를 얻기 위한 대가의 상징으로 남았다.
그리고 39년이 흐른 2026년 5월. 또다시 그의 이름이 거론됐다. 스타벅스코리아가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에 맞춰 진행한 이른바 '탱크데이' 이벤트 때문이다.
회사는 자사 텀블러 제품인 '탱크 텀블러'를 홍보하며 "탱크데이", "책상에 탁!"과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이에 대해 즉각 반발했다.
5·18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의 탱크를 연상시킨다는 비판과 함께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경찰 발표를 희화화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쏟아졌다.
논란은 빠르게 확산됐다. 시민사회와 정치권은 "민주주의 희생자들을 조롱한 역사 감수성 부재"라고 비판했고, 온라인에서는 불매 움직임까지 번졌다.
결국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은 공개 기자회견을 열어 5·18 유가족과 박종철 열사 유가족에게 직접 사과했다.
그는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며 "고개를 숙였지만, 일부에서는 "단순한 실수로 보기 어렵다", "역사 인식의 문제"라는 비판도 이어졌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마케팅 문구였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 현대사에서 '탁'이라는 한마디는 결코 가벼운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고문실에서 목숨을 잃어간 청년의 마지막 순간을 왜곡했던 권력의 언어였고, 동시에 시민들을 거리로 불러낸 분노의 출발점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번 논란을 단순한 기업 실수 이상의 문제로 받아들였다.
기억해야 할 역사를 소비와 홍보의 언어로 다뤄도 되는가, 민주주의의 희생은 얼마나 쉽게 잊히고 희화화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의 한가운데에 여전히 박종철이라는 이름 석자가 있다. 그리고 그 이름을 가장 가까이에서 기억해온 사람이 형 박종부 씨다.
시대가 변하고 세대가 바뀌어도 어떤 죽음은 끝내 과거가 되지 않는다.
이번 스타벅스 논란은 한국 사회가 아직도 민주주의의 기억을 현재형으로 살아내고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박종부 씨는 그 시간을 "아직 끝나지 않은 현재"라고 말한다. 동생의 이름은 교과서 속 역사로 남았지만, 유가족에게 1987년은 여전히 삶 한가운데 놓여 있다.
국가폭력으로 가족을 잃은 뒤 그는 오랜 시간 박종철기념사업회 활동과 인권민주주의 운동 현장을 지켜왔다.
추모제와 시민행사, 장학사업을 이어가며 동생의 죽음이 단지 비극으로 소비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최근 스타벅스 논란은 더욱 큰 분노로 다가왔다.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된 사람들의 죽음이 가볍게 소비되고 희화화된다는 상실감이었다.
이에 이번 라이프 in에서는 박종철 열사의 형이자 시민사회 활동가 박종부 씨를 지난 29일 만나, 39년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와 기억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Q. 오랜 시간 '박종철의 형'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왔습니다. 동생 이름 '박종철'은 어떤 의미로 남아 있나요.
A. "박종철 하면 민주항쟁의 도화선이라는 말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실제로 동생의 죽음 이후 1987년 한 해 동안 엄청난 일들이 이어졌습니다. 6월항쟁이 있었고, 직선제를 쟁취했고, 노동자 대투쟁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런 변화의 시작점이 됐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동생을 영웅처럼만 기억하는 건 바라지 않습니다. 결국 평범한 대한민국 청년이었습니다. 공부도 했고, 고민도 했고, 분노도 했고, 행동할 줄도 알았던 청년이었습니다. 다만 불의 앞에서 침묵하지 않았던 사람이었죠. 그 시대를 함께 공감하면서 이해해주면 좋겠습니다."
Q. 동생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A. "막내였지만 굉장히 철이 일찍 든 아이였습니다. 약간 애늙은이 같았다고 할까요. 이해심도 많았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늘 리더 역할을 했습니다. 집안에서는 정말 보물 같은 존재였어요. 한번 마음먹은 건 끝까지 해내는 집념도 강했습니다.
저와는 일곱 살 차이가 났는데도 술친구처럼 지냈습니다. 제가 군대를 다녀오고, 종철이도 서울대에 들어간 뒤에는 둘이 술을 자주 마셨습니다. 그 시절 학생들은 공부를 굉장히 많이 했어요. 논리도 뚜렷했고요. 종철이도 그랬습니다. 저한테도 늘 '형님 공부 좀 해라' 하면서 훈계하곤 했어요. 뜨거운 마음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친구였습니다."
Q. 남겨진 가족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시간이었습니까.
A. "박종철이라는 이름이 갖는 상징성이 워낙 크다 보니, 남겨진 사람들이 감당해야 하는 무게도 컸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동생을 기리는 일들을 더 크게, 더 멋지게 해내고 싶지만 현실적인 한계에 자주 부딪혔습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던 건 결국 시민들이었습니다. 늘 기억해주고 추모해주고, 후원해주고, 손 내밀어준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박종철센터도 관악구가 건립해서 위탁 운영 중이고, 사업회 자체는 순전히 회원들의 회비와 시민 후원으로 유지됩니다. 결국 시민들이 기억을 지켜낸 셈입니다."
Q.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하는데요. 그런가요?
A. "잊히는 건 아니죠. 다만 익숙해지는 것 같습니다. 박종철의 부재에 익숙해진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겁니다.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납니다. 동생이 세상을 떠난 뒤 거의 2년 가까이 가족끼리도 종철이 이야기를 잘 하지 못했습니다. 상처를 건드릴까 봐 서로 피했던 거죠. 그런데 말을 안 한다고 잊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가슴 안으로 더 깊이 묻히는 것 같았습니다."
Q. 최근 스타벅스 논란처럼 역사적 기억을 둘러싼 논란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A. "저는 민주주의나 인권 이전에, 우선 죽음을 희화화했다는 점에서 굉장히 분노했습니다.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말 자체가 사람의 죽음을 숨기기 위해 만들어진 거짓말 아닙니까. 탱크 역시 마찬가지고요. 죽음과 국가폭력을 상업적으로 소비하고 광고에 이용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불편했습니다.
요즘 보면 혐오와 극단적인 표현들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그걸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흐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일부 엘리트 집단들까지 그런 행동을 반복하는 건 우려스럽습니다. 이번 논란도 완전히 별개의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Q. 민주주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다고 보십니까.
A. "1980년 5월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됐을 때 저 역시 새벽에 끌려간 경험이 있습니다. 권총을 들이대면서 연행됐고 한 달 정도 고생했습니다. 그래서 12·3 계엄 이야기를 들었을 때 몸이 굳어버렸습니다. 그 시절 기억이 너무 생생하게 떠올랐거든요.
그런데 동시에 국회로 달려와준 시민들을 보면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저는 민주주의가 살아 있는 생명체 같다고 생각합니다. 늘 건강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약해지고 병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 돌보고 키우고, 힘을 보태야 합니다. 지난 세월 동안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지켜냈듯 앞으로도 그렇게 함께 지켜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지금 시대의 젊은 세대는 무엇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A. "예전에는 '연대'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회가 워낙 파편화돼 있어서 젊은 세대가 그 감각을 체감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 시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해봤으면 좋겠습니다. 과거 세대를 공감하려는 시도 자체가 결국 부모 세대를 이해하고, 세대와 계층 사이를 연결하는 시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 내년이면 박종철 열사 40주기입니다. 어떤 시간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A. "내년이 박종철 열사 40주기이고 6월항쟁 40주년입니다. 여러 사회단체들과 함께 준비하고 있습니다. 기억이 희미해진다고 해서 ‘이제 그만하면 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 이야기하고, 더 기억하고, 더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이 결국 또 다른 행동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다시 민주주의를 지키는 힘이 된다고 믿습니다."
Q. 마지막으로 동생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A. "개인적으로는 늘 그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네 이름에 누가 되지 않는 삶을 살아야겠다.' 실제로 그렇게 나쁜 삶은 살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웃음) '야, 네 이름 안 더럽히려고 참 노력 많이 했다' 그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이제 곧 6월입니다. 39년 전 뜨거웠던 여름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지켜낸 민주주의라는 살아 있는 생명체를 더 건강하게, 더 크게 키워나가기 위해 함께 손잡고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 경기신문 = 서혜주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