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16 (목)

  • 구름많음동두천 28.7℃
  • 흐림강릉 32.8℃
  • 흐림서울 28.9℃
  • 흐림대전 28.9℃
  • 흐림대구 32.1℃
  • 구름많음울산 34.0℃
  • 흐림광주 28.3℃
  • 흐림부산 29.0℃
  • 흐림고창 28.3℃
  • 흐림제주 30.0℃
  • 흐림강화 26.5℃
  • 흐림보은 28.1℃
  • 흐림금산 27.2℃
  • 흐림강진군 27.8℃
  • 구름많음경주시 33.6℃
  • 구름많음거제 29.6℃
기상청 제공

[오늘의 공연] 역사 속 법정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연극 ‘잔류시민’

한국전쟁 속 ‘부역자 재판’ 배경…근본적 질문 던져
무너진 사회 질서 속 일그러진 ‘법의 잣대’ 그려내
오는 14일까지 대학로극장 쿼드에서 공연 계속

 

“재판이 정말 당신들이 앉아있는 법정에서만 열리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혼란과 혼동의 시대.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했던 사람들.

 

연우무대 창단 50주년 기념 공연이자 제47회 서울연극제 공식 선정작인 연극 ‘잔류시민’이 관객들을 또 하나의 법정으로 불러들인다.

 

작품의 배경은 한국전쟁 중인 1950년 말이다. 총성 속 한반도는 또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바로 ‘부역자 재판’이다.

 

1950년 12월, 국회는 부역행위 특별처리법을 제정하고 북한 점령 시기 북한 정권에 협력했거나 반국가 활동에 가담한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 작업에 나섰다.

 

인민위원회 간부와 군사행정 협조자, 선전 활동 참여자 등이 체포 대상이 됐으며 사형과 무기징역, 장기 징역, 재산 몰수 등 강도 높은 처벌이 뒤따랐다.

 

그러나 현실은 법 조항만큼 단순하지 않았다.

 

북한군 점령 아래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요에 의해 협력한 사람과 자발적으로 체제에 동조한 사람을 구분하기 어려웠고, 전쟁 과정에서 얽히고설킨 개인적 원한과 보복 심리 역시 재판에 영향을 미쳤다.

 

수많은 고발과 신고가 쏟아졌고 군사재판이 광범위하게 이뤄지면서 지역사회는 깊게 분열됐다.

 

그 과정에서 “자발적 협력인가, 생존을 위한 선택인가”라는 질문은 지금까지도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논쟁으로 남아 있다.

 

 

연극 ‘잔류시민’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작품은 부역자 재판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단순히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법정 안과 밖을 넘나들며 ‘누가 타인을 판단할 권리를 가지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관객들에게 던진다.

 

무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어지럽게 쌓인 종이 더미들이다. 그것이 신문인지, 전단인지, 혹은 누군가를 고발하는 진술서인지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마치 전쟁통의 혼란스러운 사회를 상징하듯 구겨진 종이들은 무대 곳곳을 메우고 있다.

 

정돈되지 않은 책상과 의자들은 법정이면서 동시에 피난처 같고, 사무실이면서 폐허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품은 한국전쟁 당시 발생한 역사적 사건인 ‘한강 인도교 폭파’를 간접적으로 언급한다.

 

천장 아래 매달린 끊어진 다리 형태의 조형물은 전쟁이 남긴 상처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며 공연 시작과 함께 울려 퍼지는 전투기 소리와 피난민들의 움직임은 관객들을 단숨에 1950년대로 끌어들인다.

 

무대 위 인물들은 모두 ‘부역자 재판’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다.

 

판사와 그의 가족, 지인들, 검사, 재판을 받는 잔류시민들은 각자의 입장과 상처를 안은 채 서로 얽히고 충돌한다.

 

특히 작품의 중심에는 부역자 재판을 담당하는 판사 김병호가 있다.

 

그는 특별조치령에 따라 상대적으로 경미한 행위까지도 중형으로 처벌하려는 분위기에 의문을 품는다.

 

법이 정의를 실현하기보다 복수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는 그는 결국 자신이 재판을 맡은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그러나 그 판결은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 된다.

 

김병호의 판결에 불만을 품은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소속 검사는 그의 가족들을 차례로 기소하기 시작한다.

 

법을 통해 정의를 지키려 했던 판사는 어느 순간 자신과 가족이 법의 심판대 위에 오르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는다.

 

작품은 이 과정을 통해 전쟁이 남긴 상처를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생각치 못한 대답이 밀고로 이어진 사람, 협박 속에서 원치 않는 선택을 한 사람, 복수를 위해 법을 이용하는 사람 등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며 선과 악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연출 역시 이러한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전체적으로 노란빛이 감도는 조명은 폐허가 된 시대의 먼지 낀 공기를 연상시키고, 정리되지 않은 무대는 무너진 사회 질서를 연상시킨다.

 

배우들은 대부분 무채색 계열의 의상을 착용한 채 경직된 표정으로 무대를 오가며 불안과 긴장 속에 살아가는 당시 사람들의 심리를 표현한다.

 

조명은 장면마다 섬세하게 분위기를 바꾼다.

 

일상의 온기를 나누는 장면에서는 따뜻한 색감이 사용되지만, 심문과 재판, 갈등이 격화되는 순간에는 차가운 색조가 무대를 지배한다.

 

음향 또한 인상적이다. 화려한 효과보다 적막을 적극 활용해 배우들의 대사와 감정을 부각시킨다.

 

침묵 속에서 울려 퍼지는 한마디 한마디는 관객들에게 더욱 큰 무게로 다가온다.

 

전투기 소리와 긴장감 있는 효과음은 전쟁의 기억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환기시킨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객석과 무대의 경계를 허무는 연출이다.

 

배우들은 재판 장면에서 객석 사이를 오가며 연기하고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사건을 지켜보는 방청객이자 배심원의 위치에 놓인다.

 

관객들은 어느새 누군가의 죄를 판단하고, 또 그 판단이 과연 정당한지 스스로에게 되묻게 된다.

 

 

이러한 장치는 작품의 핵심 질문과 맞닿아 있다.

 

“재판이 정말 당신들이 앉아있는 법정에서만 열리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극 중에서 재판은 법정 안에서만 이뤄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서로를 감시하고 의심하며 낙인을 찍는다. 불완전한 정보와 소문, 개인적 감정이 누군가의 운명을 결정한다.

 

이러한 모습은 전쟁 직후의 한국 사회를 넘어 오늘날에도 유효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 수많은 뉴스와 영상이 넘쳐나는 시대.

 

우리는 종종 제한된 정보만으로 누군가를 평가하고 비난한다. 진실을 충분히 확인하기 전에 여론이라는 이름의 법정에서 판결을 내리기도 한다.

 

연극 ‘잔류시민’은 특정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단순한 시대극에 머물지 않는다.

 

부역자 재판이라는 비극적 역사를 통해 인간의 판단과 책임, 정의의 의미를 묻는다.

 

그리고 관객들에게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타인을 판단하는가?”

 

역사 속 법정에서 시작된 질문은 객석을 거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도달한다.

 

연극 ‘잔류시민’은 오는 14일까지 대학로극장 쿼드에서 계속된다.

 

[ 경기신문 = 서혜주 기자 ]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