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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지나온 길, 다 과거의 명성일 뿐

나의 사적인 예술가 - 감독 켄트 존스

 

오스트리아 작가로 빈 학파의 일원이었던 아르투어 슈니츨러가 영화를 하는 사람들에게 톡톡히 알려진 것은 순전히 스탠리 큐브릭 감독 때문이다. 큐브릭은 슈니츨러의 정신분석학적인 단편소설 ‘꿈의 노벨레(1926)’를 ‘아이즈 와이드 셧(1999)’이란 제목의 영화로 만들었으며, 원작은 영화 개봉으로 국내에서 재출간됐다. 영화의 주인공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의 상반신이 드러난 상태의 키스 신을 표지로 한 ‘아이즈 와이드 셧’ 각본집도 나왔다. ‘꿈의 노벨레’만큼 유명해진 슈니츨러의 단편이 ‘레이트 페임(Late Fame)’인데, 1894~95년 집필한 이 작품은 놀랍게도 2014년, 그가 사망(1931)한 지 83년 만에 유고집 형태로 최초 출판됐고, 그래서 화제를 모았다. 그 ‘레이트 페임’이 이번에 감독 켄트 존스에 의해 ‘나의 사적인 예술가(2026)’란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한국어 제목의 느낌과 달리 ‘나의 사적인 예술가’는 고상하고 예술 지향적이며 영롱한 예술적 결기 같은 감정과는 거리가 있는 작품이다. 오히려 다소 낯 뜨거운 소동극 같은 흐름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면 영화 제목을 원작 그대로 ‘늦은 명성’으로 가져가야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늦은 명성’은 양가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명성이 늦게 (다시 한번) 찾아왔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과거의 명성은 이젠 낡은 것에 불과하다는 뼈아픈 자각의 의미로도 쓰일 수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에드 색스버거(윌렘 대포)가 처한 상황이 딱 그런 형국이다.

 

 

에드 색스버거는 현재 평범한 우체국 직원이다. 올해로 우체국에서 일한 지 43년이 됐다. 그를 만난 문학 모임의 한 젊은이는 그런 그를 향해 “찰스 부코스키처럼 말이죠?”라고 말하며 그를 치켜세운다. 에드 색스버거는 47년 전인 1979년에 시집을 냈고 잠깐, 반짝 명성을 얻었다. 그의 시집 ‘지나온 길(Way Past Go)’은 그가 윌리엄 S. 버로스 등 당대 작가와 교류하게 했다. 역시 문학 모임의 또 다른 젊은이는 “그럼 앨런 긴즈버그는요?”라며 다그치듯 그에게 묻기도 한다.

 

에드 색스버거는 40년 넘게 시를 쓰지 않았다. 그는 흘러간 시인이자 예술가일 뿐이다. 같은 아파트 아래층에 사는 폴리(토니 톤)와 친구 행크(다니엘 오레스케스) 등과 종종 포켓볼 당구대가 있는 바에 가서 진저에일 한 잔 시켜 놓고 어울리는 일을 소일거리로 삼는 평범한 70대 노인이 됐다. 바에서 만나는 친구들은 그가 유명 시집을 낸 시인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 불을 지르는 젊은이가 바로 마이어스(에드먼드 도노반)이다. 마이어스는 어느 날 그의 집 앞에 불쑥 나타나 ‘지나온 길’이 자신의 멘토급 시집이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속한 문학 모임이 있음을 알리고, 그가 한 번 함께하기를 간청한다. 처음엔 마땅치 않아 할 정도로 주저하던 에드 색스버거는 젊은 문학도들을 만나고 그들의 찬사를 받게 되면서 조금씩 자신의 시에 대한 열정을 다시 일깨우기 시작한다. 대체로 부잣집 아들들이고, 특히 마이어스가 상류층 자식인데 그는 자신의 연줄을 이용해 ‘지나온 길’이 재출간될 수 있음을 자극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소개로 만난 출판사는 요리책을 전문으로 내는 곳이다.

마이어스와 친구들은 옛 시인 에드와 함께 시 낭송회를 계획한다. 이 과정에서 모임의 일원인 글로리아(그레타 리)를 만나고, 살짝 그녀에게 빠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글로리아는 배우가 직업이지만 생계를 위해 카바레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며 산다. 글로리아는 곧 있을 낭송회에서 에드 색스버거의 옛 시를 읽기로 한다. 그녀의 연극 톤 목소리와 제스처에 매혹된 에드는 낭송회를 내심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마이어스의 매명욕에 이용당한 것임을 알게 된다. 글로리아 역시 늙은 에드에게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음이 드러난다. 그녀는 (술인지 약인지로) 잔뜩 취해서는 에드에게 자신이 미니애폴리스로 떠난다는 말을 모임의 누군가에게 전해 달라고 할 뿐이다. 젊은 예술가들을 자처하고 나서지만 모임의 회원 모두 매명욕과 인정욕구에 싸여 있는 치기 어린 젊은이들일 뿐이며, 특히 마이어스는 에드 색스버거를 이용해 낭송회와 자신이 주도하는 문학 모임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 했을 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시 낭송회에서 취한 글로리아 대신 자신의 시를 낭독한 에드 색스버거는 청중 가운데 한 명이 ‘할아버지 대박!’이라는 비아냥 소리를 듣고 충격과 상처를 받는다.

 

 

‘나의 사적인 예술가’는 예술가연, 지식인연 하는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의 속물근성을 낱낱이 드러내는 ‘속살 같은’ 영화이다. 자신이 시를 왜 쓰고 싶어 하는가를 고민하기 전에 시인부터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사방 천지임을 보여주고 고백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건 영화도 마찬가지인데, 이런저런 영화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딜레탕트’들이 영화계에도 많기 때문이다. 이런 딜레탕트는 영화 문화를 유명세 중심으로 왜곡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요즘처럼 과열 댓글이 일상화된 시대에 특정 작품과 특정 감독, 배우들을 지나치게 공격하는 일원이 되기도 한다. 감독 켄트 존스는 문학뿐 아니라 영화와 미술 등 문화계 전반에 퍼져 있는 스노비즘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셈이다. 무엇보다 그 같은 예술적 속물근성은 슈니츨러 시대인 1800년대 후반~1900년대 초반이나 지금이나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려 한다. 인간의 매명 욕구는 예술의 동력이 될 때도 있지만 약보다는 독이 된다. 특히 젊은 예술 애호가들이 인정욕구에 시달리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나의 사적인 예술가’는 그런 면에서 꽤 시의적이며 반성적이고 성찰적인 작품이다.

 

70대 노인 역을 맡은 윌렘 대포의 연기력이 영화를 주도하고 끌고 가는 작품이다. 윌렘 대포는 특이하게도 그의 얼굴 주름조차 영화적인 느낌을 주는 배우이다. 젊은 시절엔 빌런 역도 곧잘 했고(‘리브 앤 다이, 1985’), 블록버스터 출연도 잦았지만(‘스파이더맨’ 시리즈, ‘존 윅, 2014’ 등), 역시 작은 영화(‘고흐, 영원의 문에서, 2018’)에서 최고의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이다. ‘나의 사적인 예술가’는 윌렘 대포가 펼치는 노년 연기의 맛 때문에 보는 영화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이다.

 

슈니츨러의 원작 단편도 단편이지만, 한국 작가 최인훈이 1959년 발표한 단편소설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가 미국 뉴욕에서 재현되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 역시 일군의 예술가연 하는 남자들이 한 여성을 사이에 놓고 자신들의 잘난 맛, 탐미주의적이고 관념적인 면면을 한껏 드러내다 당국에 불순분자로 잡혀가서는 자신들이 그토록 내세웠던 예술을 하나의 장난처럼 치부해 버리는 촌극을 그린 내용이었다. 시대와 장소를 넘어 예술가들의 속물주의는 놀랍게도,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같은 천박함 때문에 거꾸로 예술의 소재가 되곤 한다. ‘나의 사적인 예술가’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나의 사적인 예술가’에서 모임의 막내급(16살)인 윈(루카 파도반)은 에드 색스버거에게 시인으로서 자질이 있는지 자신이 쓴 것을 읽어 달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색스버거의 ‘지나온 길’을 읽지도 않았다. 마이어스를 통해 ‘명성’을 들었을 뿐이다. 에드 색스버거는 윈에게 말한다. “네가 내 책을 안 읽었으니 나도 안 읽을래.”

 

 

‘나의 사적인 예술가’는 소품이다. 그럼에도 지난 4월, 제27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초청, 상영됐다. 한국계 배우 그레타 리를 주목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 9월 23일 개봉했다. 예술영화전용관 중심으로 전국 35개 스크린에서 상영 중이다. 전국 스크린 수는 3000개가 넘는다. 예술영화의 슬픈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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