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4월을 좋아했다. 사계절이 뚜렷한(점점 흐릿해지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4월은 마법 같은 날씨를 가지고 있다. 아침에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밤이 되어 돌아올 때까지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든다. 옷차림이 가벼워지니 발걸음도 가벼워진다. 마음은 괜히 들떠 콧노래가 나온다. 길거리엔 개나리와 진달래가, 고개를 들어보면 벚꽃잎이 휘날린다. 시원한 커피를 한잔 사서 목적지 없이 걷기만 해도 즐거운 시간들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마냥 즐겁지가 않아졌다. 올해로 10년째다. 세상엔 늘 크고 작은 비극적인 사건이 있어왔고 계속 생겨나겠지만 아직도 괜스레 기분이 이상해진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에게 악의 없이 왜 그러냐고 물어본다고 해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 나는 또 일상을 되찾고 되레 수많은 날들은 그 일에 대해 생각조차 안 하겠지만 내년 4월이 오면 나는 또 하루 이틀은 그 날을 생각하며 울적해 할 것 같다.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 1월 1일, 새해를 맞이하며 다이어리를 구매하고, 올해의 크고 작은 다양한 목표를 적고, 헬스장 1년 결제를 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4월 중순이 지나가고 있다
남들이 모두 일하는 평일 오후, A는 또다시 노트북을 펼친다. 화면을 노려본다. 눈앞에 놓인 것을 희대의 난제처럼 느끼고 있다. 하얀 배경에 커서만이 깜빡거린다. 쉬이 글이 써지지 않는다. 자기소개서. 자신을 소개하는 글. 700자 내지 1000자를 기준으로 본인을 소개하는 것이다. 막막하다. 물론 파훼법은 있다. 목적을 생각하는 것이다. 날 먹여주고 재워줄 대감집에 머슴으로 들어가기 위해 쓰는 글인지, 남들이 인정하는 학당에 어울리는 차세대 인재임을 증명하는 글인지, 준비된 전문가로서 자신의 능력을 어필하는 글인지 등. 나의 특정적인 면을 궁금해하는 상대에게 맞춰 나를 드러내면 된다. 하지만 목적을 안다고 해도 이내 곧 벽에 부딪힌다. 마음의 벽이다. 이게 정말 ‘나’가 맞나? 하는 의심의 벽이거나 목적을 너무나 잘 이해한 탓에 과도하게 멋있어진 글 속의 내가 어색하고 부끄러워지는 양심의 벽이다. 결국 한차례 글을 지우고, 다시 쓴다. 있는 그대로. 어쩐지 아까보다 글이 술술 써진다. 이번의 자기소개는 여러모로 적절해 보인다. 그렇게 글을 완성하고 다시 읽어보면 좌절할 수밖에 없다. 글 속의 인간이 허접하고 쓸모없어서. 갑자기 화가 난다. 이 방식은 너무
중학교 동창들이 모여있는 메신저 방이 있다. 각자 바빠지면서 예전만큼 자주 얼굴을 보진 못해도, 메신저 방에서 종종 대화를 나눈다. 누군가 일상 속 힘든 일을 겪은 후 메신저 방에 올리면 모두가 입을 모아 ‘그거 다 경험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만의 유행어인 셈이다. 나는 이 말에 많은 위로를 받곤 한다. 내가 겪은 힘든 일이, 곧 경험치가 되고 나를 성장시키는 좋은 발판이 된다는 말이니까. 이러한 말로 위로를 받는 것이 비단 나만의 일은 아닌 것 같다. 인터넷상에 비슷한 유행어들이 도는 것을 보았다. ‘오히려 좋아', ‘가보자고', ‘~잖아 한잔해' 등이 있다. 위 말들의 원래 뜻이나, 출처는 잘 모르겠으나 이 말들이 부정적인 상황들에 대해 웃음과 함께 긍정적인 마음을 갖게 해주는 주문과 같은 역할을 하는 듯 보인다. 나와 친구들만의 유행어와 같이,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비슷한 뉘앙스의 말들이 유행어, 사자성어, 격언 등 다양한 형태로, 다양한 시대에 존재해 왔다. 이런 종류의 말들이 존재해 온 이유는 당연하다. 인생은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상황으로 가득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불행과 시련들이 늘 우리를 방문한다. 게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