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고래잡이의 시작은 국보로 지정된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에서 비롯된다. 태화강 건너편 깍아지른 암벽(셰일과 혼펠스로 구성)에는 바다, 육지 동물의 모습, 수렵이나 어로 도구 등 신석기인들의 희망을 모아 바위에 쪼아 새겼는데 그 중 ‘작살 맞은 고래’, ‘새끼를 업고 있는 어미 고래’ 등 다양한 고래의 모습이 이채롭다. 이 유적의 연대는 견해차가 있지만 지금부터 7000~3500년 전이라고 하니 인간과 고래의 관계는 상당히 긴 역사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역사로 말하면 문자사용 이전에 해당하는 선사시대 중 신석기 시대에 해당한다. 동물을 바위에 새긴 이유는 생업이나 풍요기원 등 풍요와 안전을 가져다주길 바라는 염원의 표현이었다. 신석기 시대 이래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조선시대는 포경(捕鯨)에 관한 인식이나 기술의 부족, 관리의 수탈이 심해 오히려 포경 활동은 외면받기도 했다. 19세기 중반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관아의 수탈 때문에 어민이 고래를 잡으려 하지 않았다. 떠밀려 온 고래가 발견되면 백성을 동원해 해부시키고 그 수익금은 관아에서 독점했으므로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생사를 무릅쓰고 고래를 사냥해 보았자 역시
인천시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들이 3일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에서 옹진군 대청면에 설치될 대통령 선거 투표함을 배에 싣고 있다. ( 사진 = 연합뉴스 제공 )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10~1920년대 일제강점기, 이 당시 대청도의 유일무이한 대규모 어업활동은 고래잡이(捕鯨)였다. 2000년대에도 간혹 그물에 걸린 고래가 대청도 인근에서 발견돼 뉴스가 되곤 하는데, 이 주변에서 고래의 출현은 100년 전과 무관하지 않다. 일제강점기 대규모 포경산업으로 인해 대청도 내동 중심의 농업사회에서 선진동 중심의 어업사회로 변화는 물론 선진동 일대 인구의 유입에 따른 주택 시설의 증가, 외국인 유입에 따른 전통적 미풍양속의 저해 등 많은 영향을 미쳤다. 현재 이 섬에 거주하는 어르신들의 전언에 의하면 해방 전에도 포경선의 입항 모습부터 고래 해체 모습에 이르기까지 어릴 때 매우 흥미진진한 볼거리였고, 배가 들어올 때는 대청도 주민이 모여 구경했다고 전한다. 이렇듯 우리나라 포경산업은 19세기 후반부터 러시아가 주도권을 잡고 시작하지만 결정적 전환점은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러시아의 후퇴와 일본의 독점적 무대가 됐다. 일본 포경산업의 절정기 시점에 해당하는 1927년 황해도 해주에 있던 ‘酉鮮日報支社’의 우에무라 기자가 쓴 대청도 포경장의 풍경을 통해 대청도의 고래잡이 모습을 알아보자. ▶숨어있는 대포경장
박남춘 시장이 3·1절을 맞아 수봉산 현충탑을 참배, 신은호 시의장(왼쪽)·도성훈 교육감과 함께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 사진 = 인천시 제공 )
조택상 균형발전정무부시장이 24일 시청 접견실에서 열린 '덕적고 야구부 지원 기부금 전달식'에서 윤태일 동성사 대표, 이성훈 동후디앤씨 대표로부터 기부금을 받고 있다. ( 사진 = 인천시 제공 )
▶ 사구와 사람 ‘장산곶 북쪽에 금사사(金沙寺)가 있고, 바닷가 이십 리 거리가 모두 모래 언덕이다. 모래가 아주 잘아 금빛 같으며 햇빛에 비치어 반짝인다. 매양 바람에 따라 모래가 쌓여서 산봉우리처럼 되는데, 높아지기도 얕아지기도 하며 아침저녁으로 위치가 옮겨져서 혹 동쪽에 우뚝했다가 서쪽에 우뚝하고, 갑자기 좌우로 움직여서 일정한 방향이 없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 황해도편의 일부 내용이다. 대청도에서 얼마 멀지 않은 장산곶을 돌아가면 곧장 나오는 황해도 용연 몽금포 해안 일대의 사구를 표현한 글이다. 사구를 구성하는 금빛 모래알갱이, 바람이 부는 데로 쌓이는 부정형 사구의 천태만상, 자연이 빚은 예술작품은 바람의 방향과 세기만 알린 채 또 다른 얼굴로 등장한다. 마치 사구가 조성되는 전반적 모습은 과거 대청도 옥죽동 사구를 반추해 준다. 대청도 북동쪽의 ‘한국의 사하라’라고 불리는 옥죽동 사구. 백령‧대청 국가지질공원을 구성하는 10곳 지질명소 중 하나인데 국가지질공원 홈페이지에는 ‘국내에 존재하는 해안사구 중 그 규모가 매우 큰 편에 속하는 해안사구로 현재는 방풍림 조성으로 규모가 줄었지만 예전에는 축구장 60개 규모를 자랑했다. 바
▶ 익숙했던 2~3년차 백령도 교직 생활 정신없이 첫 해를 보내고 맞이한 2년차는 개인 관사 생활을 했다는 게 가장 두드러진 점이다. 전년에는 2인 1실에서 첫 객지 생활의 두려움을 동료와 함께 극복한 시기였다면, 2년차는 약간의 여유와 함께 1인 1실의 관사 사용 기회가 찾아왔다. 첫 해는 첫 해대로, 둘째 해는 둘째 해대로 좋았다. 1인 1실의 사용은 본인에게 거주 환경의 변화라 공허감도 있었을 것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신관사에 ‘My sweet home’ 혹은 ‘Only my space’라는 독거 관사 생활의 참 의미를 깨닫고, 나만의 색깔 있는 공간 속에 아기자기한 소품도 갖추고 작은 가정을 꾸리듯 행복하고 만족스런 생활을 한 시기였다. 덤으로 학교 담당 부서도 별실을 사용했기에 개인 관사와 별실 근무라는 나름 호재 속에 2년째를 보냈다. 소확행이 묻어나는 시기였던 셈이다. 3년차는 어땠을까? 살짝 과장하면 백령인 수준의 적응에 다다랐고, 익숙해져 여유롭고 편했던 시기였다. 사실 학급 담임의 입장에선 ‘어떤 학생 구성원과 1년을 함께 할까?’가 제일 중요한 관심사였다. 그러나 중고생 전체 150명 정도의 적은 인원수에 2년 동안 중고학생을 통합해
취업 빙하기, 경제적 악조건 속에서 구직 시험은 최소 10:1 이상의 경쟁이다. 그러려니 하며 해볼 만한 경쟁률이라 생각한다. 특히 교직은 창의적 지식과 인품이 요구되는지라 1, 2차에 걸쳐 교직과 전공 능력, 수업 능력, 교직 적성에 이르기까지 테스트를 하고 있어 타 직종에 비해 매우 까다롭게 선발한다. 신규 교사가 임용되는 나이는 보통 20대 후반. 그들은 초, 중, 고, 대학교의 학창시절을 뒤로하고 임용시험에 응시했고, 지·덕·체를 겸비했기에 합격했다. 발령을 받고 첫 임용지에 근무하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지만 첫 발령지가 섬, 그 중에서도 가장 먼 서해 최북단 백령도, 게다가 자취 경력도 없이 손수 지은 밥으로 민생고를 해결해야 하는 울퉁불퉁한 객지 관사 생활은 이들에게 2중고였으니 이들에게 인스턴트식품은 인류에게 선물한 최대의 발명품이었던 것이다. 쾌속선 타고 4~5시간 가야 도달하는 백령도에서 만기 3년의 과정을 마친 ‘L’교사의 경험담을 토대로 섬마을 신규 선생님의 생활기를 알아봤다. ▶ 신기했던 1년차 백령도 교직 생활 3년 전 2월 말 입도(入島)해 새 학기를 준비했다. 그 동안 대학교까지 16년 간 학교를 다니면서 피교육생의 위치에 있었지만,
1920년대 ‘대청사숙(大靑私塾)’의 숙장(塾長)과 ‘대청사립보통학교’ 교장을 역임했던 김학선은 당시 대청도에서 어떤 존재였을까? 1928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의 김동진 기자가 작성한 도서순례 백령도 방면 기사에 의하면 “문화정도가 향상된 대청도민들은 일찍이 이것을 염려한 바 있어 이 섬의 원로 격이오, 보통학교 교장이며, 운수회사 경영자인 김학선씨 등의 발기로 불문률(不文律)로 된 동규(洞規)가 있어서 도박을 엄금하며 옥외흡연을 금지합니다. 옥외흡연을 금지하는 까닭은 어부들이 길로 다니며 담배를 먹다가는 함부로 던지어 이전에 큰 화재가 있었음으로 이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라 범하면 벌금이 일 원이오, 도민이 도박을 하면 첫 번은 주의를 시키되 두 번 이상에는 근신을 명하여 다른 사람이 그가 회개하도록 교제를 아니하는 법입니다. 술은 외지 선박이 많이 정박하는 배진포와 옥죽포에서만 팔게 하되, 도민은 절대로 영업을 못하게 하며, 외촌사람이라도 매음덕 행위를 할 사람에게는 허가를 아니합니다. 내동을 비롯하여 농사를 위주로 하는 촌락에는 술로 말미암아 어부들이 들어와서 풍속을 깨트릴 염려가 있다고 양주와 음주를 절대로 금지하여 경박부화 음탕의 침입을 엄중히 방지
인천시 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들이 16일 시내 한 전철역에서 오는 3월 9일 치러지는 대통령선거 투표를 독려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 사진 = 연합뉴스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