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수'검색결과
상세검색얼마 전 취재 때문에 나태주 시인을 만났는데 ‘어떤 존재가 시인이 되는가. 시 없이 무탈하게 사는 삶, 지옥을 살더라도 시 쓰는 삶 중 택하라면 기꺼이 후 선택을 하는 자’라는 말을 들었다. ‘좋은 시를 쓰려면 지옥을 살아봐야 한다’는 말로도 들렸다. 실제 문인, 예술가 중 오체투지하듯 산 이들 가운데 ‘문학과 예술의 소재, 성찰이 삶의 지옥에서 빚진 게 많아 통과의례라 생각한다’ 라거나 ‘다시 태어나도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같은 길을 가겠다’고 말하는 예술가를 많이 만났다. 그들처럼 예술의 피와 끼가 없는 나는 ‘도대체 예술이 무엇이기에 지옥마저 껴안는가’라는 의문을 더하곤 했다. 스탄 게츠(Stan Gets 1927-1991)를 소개하려고 꺼낸 이야기다. 브라질 보사노바 음악을 이야기할 때 작곡자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Antonio Carlos Jobim, 1927-1994)과 함께 세트로 나오는 미국의 색소폰 연주자. 그의 음악을 처음 들은 것은 20여 년 전, 친구 작업실에서였다. FM 라디오에서 재즈가 흐르고 있었는데 색소폰 소리 하나가 훅 들어왔다. 들으면 담박 아는 명곡 서머타임(Summertime). 미국 조지 거슈인의 오페라 ‘포기와 베스’에 나오는 노래 중 하나로 엘라 피츠제널드나 빌리 홀리데이, 루이 암스트롱 등의 목소리로 즐겨 들었었다. 악기가 인간의 목소리보다 더 많은 감정을 내다니! 연주자가 누구냐고 묻는 내게 재즈광 친구가 줄줄이 읊기 시작했다. 잘생긴 외모 덕에 재즈계의 제임스 딘으로 불린다. 학교 다닐 때 전과목 우수생이었는데 음악에 미쳐 열다섯 나이부터 색소폰을 불기 시작, 10대 때 이미 이름이 났다. 세계적인 색소폰 연주자가 된 건 60년대 기타리스트 찰리 버드와 함께 낸 Jazz Samba의 대히트, 이어서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과 함께 만든 앨범‘Gets/Gillbero’가 그래미상을 받는 등 세계적인 명곡이 되면 서다 등등..... 그 당시 관악기 연주회를 가면 졸기 일쑤였던 나는 그날로 스탄 게츠의 팬이 됐고 서머타임은 노래곡이 아닌 연주곡으로 바뀌었다. 그의 색소폰 연주는 숨소리나 심장, 맥박소리처럼 들린다. 노력해서 낼 수 없는 소리고 젊은 나이에 내기 힘든 소리다. 그 소리를 내기 위해 그의 인생은 어떤 통과의례를 거쳐야 했는가. 일찍이 음악 재능을 보였지만 악기 하나 손에 쥐기 힘들었던 가난했던 어린 시절, 음악에 빠져 고등학교 중퇴, 20대에 마약 중독으로 인한 감옥 생활, 자살 시도, 폭력 성향으로 인한 가족 불화, 이혼, 암투병 끝에 64세 나이로 생을 마침. 그의 색소폰 소리는 그같이 고통으로 점철된 삶을 제물로 바친 대가였을까. 다시 태어난다면 스탄 게츠는 저 지옥을 품은 음악인생을 선택할까. 그에 대한 답을 나는 유작이 된, 암 투병 중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올랐던 덴마크 코펜하겐 공연 녹음 음반 ‘Stan Gets-Kenny Barron/People Time’에서 들었다. 말기암의 고통과 죽음의 그림자가 그와 색소폰 소리를 끌어내리는 게 느껴지는데 힘들어 보이지 않는다. 그가 생전에 낸 150장 넘는 그 어느 음반보다 완벽하게 들린다. 왜 예술이 삶도 죽음도 초월하는 것인지 알겠다.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기사 속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비현실적이다, 미국 빌보드에서 올해 최장기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방탄소년단의 버터(Butter) 이야기다. 100년 가까운 빌보드 역사는 대개 영미팝음악의 잔치였다. 빌보드 신기록을 향해 달리고 있는 녹지 않는 ‘버터’의 인기에 우리뿐 아니라 세계도 놀라고 있다. 50년 전인 1965년, 빌보드에 고개를 내민 월드뮤직 한 곡이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앨범차트 2위, 싱글차트 5위까지 오른 브라질 노래 ‘걸 프롬 이파네마(Girl From Ipanema)’. 브라질의 걸출한 작곡가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Antoio Carlos Jobim, 1927-1994)은 브라질 전통 음악 삼바에 모던재즈를 섞은 이 노래로 보사노바(Bossa Nova)라는 새로운 음악장르를 탄생시켰다. 과거 포르투갈 식민지였기에 남미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쓰는 브라질. 보사노바는 포르투갈어로 ‘새로운 경향’ 정도의 의미다. ‘걸 프롬 이파네마’는 새로운 경향 정도가 아니라 지금까지 식지 않는 보사노바 열풍을 일으킨 월드뮤직 명곡이다. 빌보드 히트와 함께 노래가 담긴 앨범을 미국에서만 50만 장 이상 팔아치우고 같은 해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앨범으로 선정되기까지 했다. 이파네마는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루 남쪽의 해변이다. 노래 가사는 대략 이런 분위기다. ‘봐봐 이 아름다운 모습을 / 우아함으로 가득해/ 이쪽으로 다가와 스쳐 지나가는 바로 그녀 말이야/달콤한 몸짓으로 해변가로 향하는 그녀 말이지/ 이파네마의 태양에서 온 금빛 갈색 피부의 그녀/그녀 몸짓은 한 편의 시보다 더 아름답고/ 내가 스쳐온 어떤 것들보다 아름다운 풍경인 걸’ 실제 노래를 내놓기 3년 전인 1962년 겨울. 작곡가 친구와 함께 이파네마 해변 카페에 앉아있던 조빔은 그 앞을 지나는 열아홉 소녀를 보게 된다. 작곡가 친구의 ‘ 저길 봐,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소녀가 지나가!’라는 찬탄에 영감을 얻어 바로 작곡한 노래가 바로 ‘걸 프롬 이파네마’ 란다. (당시 두 사람이 이미 결혼한 몸이라는 것을 굳이 이야기해야 할지......) 이 노래는 미국의 재즈 색소폰 주자 스탄 게츠와 브라질 기타리스트 후앙 질베르토가 64년 내놓은 앨범의 타이틀곡이었는데 작곡자 조빔은 피아노 연주로도 참여했다. 50여 년 동안 세상의 별처럼 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하여 불렀으나 후앙 질베르트의 부인인 보사노바의 여왕 에스트루드 질베르토의 청아한 목소리가 최고다. (남편 후앙의 목소리도 함께 흐른다) 혹, 이파네마 해변의 열아홉 소녀의 그 뒤 스토리가 궁금한 분 안 계신가? 노래 히트 후 소녀는 이파네마 해변에 레스토랑을 개업, 대박 사업가가 됐다나?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기사 속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도둑을 만날 수도 있고 납치될 수도 있어요’ 20여 년 전, 배낭여행 중 들른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 앞. 궁전 건너 보이는 하얀 동굴같은 집들이 궁금해 묻는 내게 현지인은 집시마을 사크라몬떼라며 위험을 경고했다. 호기심이 두려움에 앞서 결국 마을로 들어갔다. 반쯤 문 연 집이 보여 노크했더니 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나온다. 한 세 평 될까 싶은 흙바닥에 예닐곱 살 여자아이들 서너 명이 엉켜 놀고 있었다. 누더기 같은 옷차림도 반 벗은 채였다. 인기척에 돌아보는 아이들 얼굴에 잠깐 숨이 멎었다. 치렁치렁 긴 검은 머리, 커다랗고 검은 눈, 붉은 입술이 뿜어내는 매혹이 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별점과 도둑질을 일삼고 바이올린 하나로 집단가무를 즐기며 유랑하던 집시의 피가 만들어낸 것일까. 아이들의 얼굴이 다시 떠오른 것은 여행에서 돌아와 들은 한 곡의 음악 때문이었다. 스페인의 플라멩코 피아니스트인 다비드 페냐 도란테스(David Pena Dorantes)의 앨범 속 오로브로이(Orobroy). 아이들을 만났을 때처럼 잠깐 숨이 멎었다. 아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처럼 한 단계 한 단계 상승해가는 피아노 음이 판타지의 세계로 이끄는 듯하더니 집시 아이들의 합창소리가 (절규 같은!) 도로 속세로 끌고 와 혼을 뺀다. 생경하고 충격적이었다. ‘어떻게 이런 악상이 가능할까! ’ ‘작곡자는 천재일 거야! ’ 작곡자 도란테스는 할머니, 아버지, 삼촌 모두 플라멩코 뮤지션이었던 플라멩코 명가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전통에 머물지 않고 플라멩코 상징 악기인 기타를 피아노로 바꾸고 클래식, 재즈, 록을 접목시키는 등 플라멩코의 새 역사를 써나갔다. 천년 유랑, 수난의 삶 속에서 고통을 잊기 위해 만든 집시음악 플라멩코의 정신은 한 서린 가사를 통해 지켰다. 그가 만든 새로운 플라멩코 중 오로브로이는 스페인은 물론 세계인의 경탄과 사랑을 받은 대히트곡. 오로브로이의 뜻은 집시 언어 로마니로 ‘생각했다’라는 뜻인데 노래 가사는 집시의 삶처럼 뜨겁고 강렬하다. 일부분을 소개해 본다. 내 피를 흐르는 오래된 목소리/ 과거의 기억으로 울고 노래하지만/ 내 영혼은 향기를 품습니다/이 세상의 고통 대신 장미의 씨앗을 선사해준/ 신을 나는 느낍니다. 삶 속에서 만들어진 노래와 심장에서 흘러나온 선율은 뜻은 몰라도 국경을 넘고 마음 벽을 넘는다. 문명 이전의 원시성, 야생성을 품은 목소리가 각박한 삶을 위로하고 치유한다. 집시 음악이 대표적인 월드뮤직으로 사랑받는 이유다.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com을 치면 기사 속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세인트 빈센트 그레나딘, 아루바, 앤티카 바부다, 안도라, 에스와 티니, 에리트리아, 기니 비 시우, 상투메프린시페, 세이셀, 차드, 바베이도스.... 국가명들이다. 지구 상 어느 곳, 어떤 나라인지 아는가? 지난 23일, 도쿄올림픽 개막식 때 입장한 세계 205개 나라 선수단을 보며 아직도 낯선 국명들이 여럿 있구나 생각했다. ‘카보베르데’가 나온다. 월드뮤직 강사가 되기 전에는 몰랐던 이름. 가수 세자리아 에보라(Cesaria Evora 1941-2011) 때문에 알게 된 이름. 말하자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모르거나 관심이 없었는데 BTS 때문에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비슷한 예다. 여기까지 읽고 바로 유튜브 영상 등을 통해 ‘세자리아 에보라’를 찾아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거구의 늙은 흑인 모습이 뜰 것이고 사시 눈에 고생 찌든 느낌의 얼굴을 볼 것이다. 반전은 목소리다. 어두운데 무겁지 않다. 밝다. 이런 컬러의 목소리가 있었던가. 한 곡 더..... 하다가 모든 노래를 찾아 듣게 될 것이고 베사메 무쵸(Besame Mucho)에 이르면 ‘대체 어떤 삶이 이런 목소리를 만들어냈을까?’라는 궁금증으로 폭풍 검색에 들어갈 것이다. 이제는 세상에 없는 그녀. 10년 전인 2011년, 천상병 시인 시를 빌리면 70년간의 ‘지상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갔다. 천 시인의 삶이 지옥이었기에 그 시가 아팠듯 지옥을 오체투지 한 그녀 삶 때문에 노래가 아프다. 신발을 못 신고 다닐 정도로 가난했던 집안, 여덟 살에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일곱 자식을 감당 못한 어머니에 의해 고아원에 버려진 세자리아 에보라. 어린 나이부터 선술집을 돌며 노래 부르던 에보라는 세 번의 결혼 실패 후 폭음과 폭주로 삶을 망가뜨린다. 먹고살기 위해 불렀던 그녀의 모든 노래에 깔린 비애가 이해된다. 그 목소리는 프랑스의 음악 프로듀서에 의해 발탁, 유럽에 소개되고 얼마 안가 ‘모르나의 여왕’으로 유명세를 얻는다. 모르나. 카보 베르데 전통음악으로 ‘슬퍼하다’는 뜻의 영어 Mourn에서 나온 단어다. 아프리카와 포르투갈의 리듬, 남아메리카 대륙의 노래 등이 뒤섞여 만들어진 모르나의 정서는 짧지만 굴곡진 카보베르데 역사를 알아야 이해된다. 15세기 중반까지 무인도였던 카보베르데는 포르투갈 항해사의 발견 후 노예무역 중간 정박지로 쓰인다. 비극사의 시작. 포르투갈 등 유럽 백인들과 아프리카 흑인들 중 정착민이 생기면서 나라꼴을 갖추어가지만 500여 년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살아야 했다. (1975년 독립) 식민의 설움도 힘겨운데 가뭄과 기근이 반복돼 국민들은 먹고살기 위해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게 된다. 식민, 굶주림, 이산..... 그 삶 속에서 흘러나온 노래, 위로하고 견디게 한 노래, 차라리 기도였던 노래들이 모르나였다. 고국과 개인의 참혹한 삶의 변주가 탄생시킨 모르나, 전 세계인은 세상에 없던 그녀의 목소리에 열광했다. 세자리아 에보라의 목소리는 지도상에서도 누락되던 인구 54만 명의 대서양의 섬나라 카보베르데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수도는 프라이아, 화폐는 에스쿠도, 공용어는 포르투갈어.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상 니콜라우 섬의 봉우리들, 풍화작용에 의한 바이슈 호샤 해변의 해안절벽 비경은 숨 막힐 정도란다. 세자리아 에보라의 명곡 소다데(Sodade)를 흐르게 한 후 전통술 그로그(Groug)까지 곁들인다면!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음악의 치유효과를 수없이 경험했다. 노라 존스의 목소리가 처음 세상에 알려진 2000년대 초반, 어느 날의 이야기. 가을밤, 예고 없는 비에 젖은 생쥐꼴로 귀가하던 중 아파트 밖 자전거를 들이다 발목을 삐었다. 절룩대며 집안에 들어섰는데 열어놓은 베란다 사이로 들이친 비에 책들이 흠뻑 젖어있었다. 으악, 비명이 올라오는데 울리는 전화벨. 반가울 리 없다. 더군다나 ‘죽이는 목소리가 있어 들려주려고’라는 말에 짜증이 더해졌다. 지금 음악 따위 들을 분위기 아니라고! 냅다 지르려는 소리를 전화선을 타고 넘어온 목소리가 덮는다. 수화기를 든 채 커피포트 스위치를 올렸다. 커피 향이 번지는 창가 소파에 몸을 기댔다. 구질구질한 비에 젖은 시가가 천천히 영화 속 풍경으로 바뀐다. 친구의 표현은 적확했다. 죽이는 ‘음악’이 아니라 ‘목. 소. 리’였다. 대체 불가의 목소리. 가을, 밤, 비, 커피와 너무나 어울리는 목소리. 노라 존스. 컴 어웨이 위드 미(Come Away With Me) 지금이야 세계적인 재즈 가수지만 그때는 첫 앨범을 냈을 때니 신예였다. 앨범이 발표되자마자 400만 장 팔려 대히트를 기록했고 그다음 해 2003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음반, 올해의 레코드, 최우수 신인상 등 모두 7개 부문을 석권했다. 수상과 함께 CF스타가 되었다. 딱 봐도 인도 혈통이 느껴지는 미인. 알고 보니 인도의 시타르 명인 라비 샹카의 딸이었다. 라비 샹카의 딸이라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시타르 스타가 된 아누시카 샹카를 떠올리겠지만 그녀는 공식적인 친딸이고 노라 존스는 말하자면 비공식적인 친딸. 인도, 명상에 심취한 비틀스 조지 해리슨의 시타르 스승으로 유명세를 얻은 라비 샹카. 세계연주여행을 하며 남모르는 사랑여행도 했는가 보다. 1979년 뉴욕에서 활동 중이던 라비 샹카는 프로듀서 수 존스와 사랑에 빠져 아이까지 낳았다. 유부남이었기에 드러낼 수 없었고 아이 이름도 어머니의 성을 따 지어야 했다. 아이 7세 때까지 몇 번 만나주다 발길을 끊었다. 아버지는 떠났으나 재능은 남았다. 10대 시절 가수 생활을 시작한 노라 존스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 따뜻하고 깊은 목소리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2001년 9.11 테러 당시 건물처럼 무너진 미국인들을 어루만진 노래가 그녀의 ‘Don’t Know Why’. 치유의 목소리 었다. 그러나 그녀 자신은 정작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그림자를 치유받지 못했다. ‘아버지와 연락은 되지만 그와 나의 음악은 아무 관계가 없으며 그에 대해 말하는 것도 싫다’고 공개적인 자리에서 말했다. 노라 존스의 탄생 2년 뒤 태어난 아누시카 샹카는 아버지의 사랑은 물론 세계적인 스타의 딸로서 세상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아버지는 자신의 끼를 물려받은 딸에게 직접 시타르를 가르치고 데뷔시키고 세계적인 스타로 키웠다. 노라 존스가 첫 앨범으로 그래미를 휩쓸던 2003년 그해 아누시카 샹카도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 라비 샹카는 노라 존스가 가수가 된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나. 성공으로 세상의 사랑을 받으며 마음이 녹았는가. 아버지와 동생에게 ‘Come away with me’라고 손을 내민다. 동생 아누시카 샹카와 만나 함께 앨범을 내더니 (Trace Of You) 아버지와 동생의 앨범 작업에도 응한다. (Breathing Under Water) 전화선을 타고도 단박에 나를 사로잡았던 ‘Come Away With Me’ 돌아보니 그 목소리를 찾아들을 때는 대개 세상에 치여 힘들 때였다. 오랫동안 사랑받지 못했던 자가 오랫동안 사랑을 갈구한 끝에 오랜만에 사랑의 볕을 쪼이면서 내는 목소리. 노래를 듣고 나면 힘이 났다. 비 오는 날, 혼자 있을 때, 차 한 잔 들고 창가에 앉아 들어보기 권한다. (인터넷창에서 www.월드뮤직.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작업실에 놀러 온 음악광 친구가 유튜브 뮤직으로 이것저것 찾아 듣는다. 귀에 익으면서 낯선 선율이 심장을 훑고 지나간다. 무슨 음악인가 물었다. “시타르” “라비 샹카?” “아니 딸. 아누쉬카 샹카. 시타르 별로라면서?” “딸 건 좋네 ” 월드뮤직이 낯선 이에게 선문답으로 들리겠다. 정리하자면 친구가 틀었던 음악은 아누쉬카 샹카(Anoushka Shanker)의 시타르(인도전통악기) 연주인데 그의 아버지 라비 샹카(Ravi Shanker 1920-2012)는 세계적인 시타르 연주자다. 대가인 라비 샹카의 시타르 연주에 관심 보이지 않았던 내가 딸의 시타르 연주에 반응하자 의아했던 것이다. 친구가 음악광다운 한 마디를 보탠다. “하긴 월드뮤직은 전통, 민속만 고집하면 안 돼. 섞어야지” 시타르를 처음 만난 건 20년 전, 인도 배낭여행할 때다. 북서부 타르 사막 도시인 자이살메르까지 흘러들어 갔는데 초여름 비수기라 동행 여행자가 나 말고 서너 명뿐이었다. 가이드와 여행자들이 쉴 곳을 찾아 가는데 사막 풍경을 더 보겠다고 혼자 남았다. 사막은 처음이었다. 건물과 사람과 소음이 일상이던 도시인에게 ‘아무것도 없는 곳’이 주는 충격은 컸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오래오래 앉아있었다. 노을이 졌다. 일행에게 가야겠다고 생각해 일어서는데 어디선가 지잉, 지잉하는 낯선 현의 퉁김이 들려왔다. 삼사십 미터 거리의 사구(砂丘) 위에 터번 쓴 노인이 앉아있었다. 기타 비슷한 현악기를 든 노인의 모습은 무대 위에 오른 연주자 같았다. 나 외에 아무도 없는데, 노인은 어디서 온 누구일까. 비현실적인 무대였고 연주자였다. 돌아보면 그 생생했던 기억이 사막에 취한 상태의 신기루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까지 든다. 사막 다음의 여행지를 일부러 시타르 연주회가 열리는 곳으로 정했다. 지방 소읍이었지만 열 평 남짓 공간에 너덜너덜 찢어진 벽지가 눈에 거슬렸던 공연장, 전통 복장차림이었으나 머리 부스스한 연주자의 표정 없는 얼굴, 한없이 반복되는 (것처럼 느껴진) 가락의 지루함 등, 실망을 준 관람이 기억난다. 호기심이 사라지니 감흥도 사라졌다. 연주자 탓이라고 생각해 시카르의 대가 라비 샹카의 연주를 찾아들었는데 그것도 별 느낌이 없었다. 그렇게 시타르는 멀어졌다. 강산이 두 번 변한 세월이 흐른 지금, 음악광 친구 덕에 다시, 전혀 다른 시타르를 만나게 된 것. 내가 접한 라비 샹카의 시타르는 전통적인 느낌이 강했는데 딸 아누쉬카 샹카의 시타르는 달랐다. 인도 문화가 주는 명상과 신비의 느낌은 놓지 않으면서 서양 악기와의 협연 등 다양한 시도를 통해 현대적인 느낌을 더했다. 세련되고 편안했다. 친구 말대로 ‘섞어서’ 성공한 경우였다. 왜 영국의 비틀즈, 롤링 스톤즈가 시타르에 빠지고 작품 속에 넣었는지 이해가 갔다. 서양 악기의 한계를 넘을 돌파구가 필요했을 것이고 그것을 인도의 색다른 소리에서 찾았을 것이다. 비틀즈의 조지 해리슨은 라비 샹카에게 직접 시타르를 배우기까지 했다. 힌두교 신자가 된 것도 알려진 이야기다. 딸 아누쉬카 샹카와 라비 샹카를 둘러싼 이야기 중 재미난 이야기가 많다. 다음 회에 이어진다. 참, 음악광 친구가 유튜브를 통해 나를 시타르의 세계로 재호출 한 아누쉬카 샹카의 연주곡명은 ‘보이스 오브 더 문(Voice of the Moon)이다. (인터넷창에서 www.월드뮤직.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밥 말리 하니 카오산 로드가 떠오른다. 90년대 초반, 배낭여행하던 중에 경유지였던 태국 방콕 공항에서 일부러 빠져나가 찾았던 거리. 300미터 남짓 되는, 길 양쪽에 음식점과 숙소, 기념품점, 술집 등이 어지러운 간판과 함께 즐비한데 그 사이를 오가는 이들은 모두가 여행자다. 생경한 풍경이었다. 공기도 달랐다. 술 없이도 달뜨고 취하게 했다. 뜬금없이 노래가 주술을 걸었나 생각했다. 생각하니 지금도 귀가 뜨겁다. 상점 곳곳에서 나오던 노래. 밥 말리의 노래를, 그것도 같은 노래를, 그것도 하루 종일 틀어대는 곳이 많았다. 노 우먼 노 크라이(No Woman, No Cry). 사랑 노래라고 생각했다. 여름이었고 청춘이었고 여행자였으니까. 한참 후에 알게 됐다. ‘노 우먼 노 크라이’는 밥 말리가 인생의 겨울을 사는 이들을 위로하는 노래였다. 서른여섯에 요절한 밥 말리는 짧은 생애, 노래하는 전사로 살았다. 인권과 자유, 평등을 위해 싸웠다. 그가 살았던 시대, 그를 낳은 환경이 그를 투사로 만들었다. 밥 말리의 고국 자메이카. 북미 카리브해 쿠바 밑에 위치한 이 섬나라는 1494년 콜럼버스의 발길이 닿은 후 쑥대밭이 되었다. 스페인 통치에서 영국 통치로 넘어가면서 유럽인들이 가져온 전염병과 모진 학대는 원주민 대부분을 사망하게 만든다. 영국은 그들의 빈자리를 아프리카에서 끌고 온 노예들로 채웠다. 현재 자메이카 국민 90% 이상이 아프리카 노예 후손인 이유다. 1960년대부터 유행한 레게 음악은 흑인 노예들의 한숨에 묻어 나온 아프리카 토속 리듬이 미국의 리듬 앤 블루스와 섞여 탄생된 것이다. 이 작고 가난한 섬나라의 신생 장르 음악을 세상에 알린 이가 밥 말리였다. 자메이카 독립(1962년 독립) 전인 1945년의 극심한 혼란기에 빈민가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학교도 제대로 마칠 수 없었던 밥 말리. 밥 말리가 그의 친구들처럼 폭력조직으로 흘러들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음악 재능과 종교의 힘이었다. 그가 믿었던 자메이카인의 신흥종교 라스타파리아니즘은 ‘백인들의 땅에서 결코 흑인의 행복을 찾을 수 없다. 아프리카로 돌아가 흑인의 유토피아를 만들자’는 소망을 교리로 만든 것. 밥 말리는 흑인인권, 아프리카 독립희망을 담은 노래로 전도했다. 빈곤, 정치 혼란이 계속 되는 고국의 현실을 비판하는 노래도 불렀다. 정권의 눈엣가시가 됐고 암살 위협을 받던 중 실제 총상을 입기도 했다. 음악전사 밥 말리의 노래는 세계 2차 대전 이후 반제국주의, 반전을 외치는 유럽의 대학가, 시위현장 그리고 물질문명을 부정하고 다른 세상을 꿈꾸던 미국의 히피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레게음악은 자메이카의 음악이 아니라 세계인의 음악이 됐다. 코로나로 모두가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는 중이다. 정말 끝이 있기나 한 걸까. 이 시절을 함께 견디게 해 줄 밥 말리 같은 가수, ‘노 우먼 노 크라이’ 같은 노래는 없는 것일까. (인터넷창에서 www.월드뮤직.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공부 잘하는 부잣집 애’에게 관심이 가지 않았다. 열 살 넘으면서 헤세의 싯다르타, 앙드레 지드의 돌아온 탕아(아! 내 인생 단편) 속 주인공에 빠져 밤을 태우던 조숙한 문학소녀는 ‘그림자 없는 인간은 깊이도 없을 것’이라 단정했다. 스무 살 넘어서도 어둠에 집착, 연애도 결손가정 출신이나 감옥 들락거리는 운동권 사내들과 했고 단골 카페도 대로변 햇빛 쏟아지는 공간이 아닌 곰팡이 냄새 피는 지하공간이었다. 청춘의 끝자락에 월드뮤직을 만나 음악으로 세계 일주를 하던 중에도 미국음악은 관심 밖이었다. 원주민 땅 따먹고 세워진 이백여 년 미국사가 낳은 음악들은 ‘오랜 역사 속 민중의 희노애락에 오욕이 발효돼 나온 월드뮤직의 본령’과 멀 것이라 예단했다. 중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즐기던 팝송 가사들이 온통 러브에 울고 웃는 내용이었던 터라 유치했다. 전두환·노태우 정권 때 대학을 다녀 반미감정도 있었다. 핑크 마티니를 늦게 만난 이유들이다. 핑크 마티니 음악이 좋다는 소리를 듣기 시작한 건 2000년 넘어서였는데 미국음악이라 패스. 그룹 이름이 핑크 마티니가 뭐야? 웬 칵테일 이름? 아마 신시사이저 웽웽 울리고 드럼 때려 부수는 정신없는 팝그룹이겠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한참 지난 어느 가을 저녁, 라디오 저녁 방송이었던가. 쇼팽 작곡의 피아노곡 (안단테 스피아나토와 화려한 대 폴로네이즈)이 흘러 클래식 방송인 줄 알고 들었는데 스패니쉬 발음의 노래가 이어졌다. 화음과 목소리가 심장을 확 긁었다. ‘ 핑크 마티니 밴드가 1997년에 내놓은 첫 앨범 심퍼티크(Sympatique)에 수록된 라 솔레다드(La Soledad)‘ 라는 디제이의 소개를 급히 손바닥에 메모했다. 바로 핑크 마티니의 CD를 구입해 들었다. 세상에! 음반의 모든 곡이 황홀지경으로 이끈다. 첫 곡 아마도 미오(Amado Mio), 타이틀 곡 심퍼티크(Sympatique), 올드뮤직 케 세라 세라(Que sera sera) 등 재료에 따라 맛을 변주하는 칵테일처럼 핑크 마티니의 음악들은 클래식은 물론 보사노바, 샹송, 칸소네, 플라멩코 등을 여러 언어로 부른 월드뮤직이었다. 음악이 좋아지니 그룹도 좋아지고 이름도 달리 들린다. 핑크 마티니가 코미디 영화 핑크 팬더, 그리고 오드리 헵번이 나온 1960년대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중 마티니 칵테일 나오는 장면에서 따왔다는 것, 음반 내기 위해 만든 ‘하인즈 레코드(Heinz Records)’라는 회사이름이 그룹 리더 토마스 로더데일이 기르던 개 이름이었다는 것을 듣고 ‘재밌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송광고음악으로 산타 베이비(Santa Baby), 행 온 리틀 토마토(Hang on little tomato), 심퍼티크(Sympatique)가 나올 때 설레기까지 했다. 팬이 됐다는 이야기다. 음악이 좋아지면 가까이서 보고 싶어진다. 세 번이나 내한 공연을 했다는데 덜익은 선입견 탓에 다 놓쳤다. 조선시대 문인 유한준의 ‘알게 되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된다’ 는 명언이 다시금 통렬히 꽂힌다. 현재도 활동하고 있는 핑크 마티니의 음악, 공연은 유튜브를 통해 넘치도록 보고 들을 수 있다. 내게는 첫 음반이 첫사랑이자 최고의 사랑이다. (인터넷창에서 www.월드뮤직.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20여년 전, KBS TV 교양프로그램 작가로 일하던 때 동네 문화회관의 부부 사교댄스 프로그램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뒷말이 많았다. 저녁 6시대에 퇴폐조장장면을 내보냈다는 이유다. 2000년 넘어서도 ‘월드뮤직 인문학’ 이름의 대기업 강의를 맡았는데 강의 직전 담당자가 찾아와서 ‘탱고’ 부분은 빼면 안되겠는가고 절박하게 물었다.(나의 대답은 ‘강사를 빼면 안되겠는가?’ 였다) 그런 이력이 있으니 2014년 피겨스타 김연아의 소치 동계올림픽 때 배경음악으로 탱고가 흐르고, 경기 후 언론이 찬사로 도배하는 것을 보고 참으로 ‘만감이 교차’ 했다. 배경음악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아디오스 노니노(Adios Nonino)’는 탱고가 저질 춤곡이 아닌 ‘클래식 반열에 오른 음악’ 임을 대중에게 널리 알려주었다. 이 음악이 세계인의 가슴을 흔든 일이 있었으니 2002년 네덜란드 왕세자 결혼식 때였다. ‘가슴을 흔든’ 데는 음악 자체의 매혹도 있겠지만 정치가 얽혀들어 비극으로 끝날 뻔했던 사랑 이야기 때문이기도 했다. 1999년 스페인 세비야의 한 파티에서 만나 첫눈에 서로 반해 결혼을 꿈꾸게 된 네덜란드 왕세자 빌럼 알렉산더르와 아르헨티나 출신의 막시마 소레기에타. 그러나 막시마의 아버지가 아르헨테나 군부독재시절 농업부 장관이었던 전력에 네덜란드 국민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친다. 국회는 특별위원회까지 구성, 막시마 아버지에 대한 조사를 벌인다. 이에 알렉산더르는 ‘국회에서 결혼을 승인하지 않으면 왕세자 자리를 내놓겠다’고 선언한다. 결국 결혼식은 ‘막시마 아버지의 불참’을 조건으로 이루어진다. 그 결혼식에서 연주된 곡이 바로 ‘아디오스 노니노’. 노래 배경을 아는 이들에게 연주 때 눈가를 닦던 신부 모습이 참으로 애잔했을 것이다. ‘아디오스 노니노’는 스페인어로 ‘안녕, 아버지’라는 뜻. 작곡자인 피아졸라는 이 음악을 이국땅에서 울며 만들었다. 유럽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피아졸라는 탱고를 클래식과 재즈에 접목, 새로운 탱고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고국에서 탱고 작곡자, 연주자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타국을 떠돈다. 1959년, 미국 체류 중 청천벽력같은 아버지의 부음을 듣는다. 아버지는 그에게 생을 두 번 준 이였으며 음악의 첫 번째 스승이었다. 이발사였던 아버지는 극빈한 살림에도 선천적으로 오른쪽 다리를 저는 아들을 고치기 위해 수차례 외과수술을 해서 완치시켰다. 여덟 살 피아졸라에게 반도네온을 사주며 음악의 세계로 이끈 이도, 모두가 탱고를 술집음악이라고 천격시할 때 ‘내 나라 피가 흐르는 음악’이라고 말해준 이도 아버지였다. 유럽 유학 이후, 재능이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는 아들에게 ‘대단한 사람이 될 거다. 앞장서 나가는 사람이 될 거다’라며 끝까지 믿어주던 아버지. 끝내 아들이 세계적인 대음악가가 되는 날을 못보고 이승을 떴다. ‘아디오스 노니노’는 아버지에게 바치는 음악이었다. 피아졸라는 ‘내 생애 이보다 더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한 바 있다. 좋은 시대다. 이제는 세상에 없는 피아졸라의 반도네온 연주를 유튜브로 바로 볼 수 있으니. 아르헨티나 피아니스트 라울 디 블라지오(Raul Di Blasio)의 연주도 추천한다. (인터넷창에서 www.월드뮤직.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전 세계 맥도날드 직원들이 BTS의 한글초성 ‘ㅂㅌㅅㄴㄷ’을 새긴 티셔츠를 입었다. BTS와 맥도날드의 협약내용이란다. 코로나 와중에도 여전히 끓고 있는 BTS의 위상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한다.노래와 춤에 재능 보였을 BTS의 어린 시절, 부모 중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고 생각해 본다. ‘일단 대학부터 나와야 사람 대접 받는다. 대중음악은 성공하기 힘드니까 정히 음악하고 싶으면 클래식을 전공해라. 집을 팔아서라도 유학 보내줄게’ 얼마나 다행인가. BTS가 서양클래식을 전공하지 않고 대학입시에 매진하지 않고 세상 어른들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은 것이! 월드뮤직계에도 ‘엄마 말 안 들어’ 성공한 스토리가 넘쳐난다. 세상 눈치 안 보고 제 안의 질문과 답만으로 길을 찾고 행복한 음악가가 된 극적 드라마 말이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가 아르헨티나의 탱고 거장 아스토르 피아졸라(Astor Piazzola 1921-1992). 생전의 피아졸라는 자신이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탱고와 심포니 둘을 오갔던 존재’라고 한적이 있다. 술집 음악이었던 탱고를 클래식 반열로 끌어올리기까지 한 음악가의 전쟁사(戰爭史)를 드러낸 말이지만 유럽 유학 시기의 지독했던 혼란과 갈등 시기를 떠올리게도 한다. 과거 우리가 음악인을 딴따라라며 무시했듯 아르헨티나에서도 탱고를 즐기는 이를 천민 취급하던 시기가 있었다. 1880년대, 유럽의 이민자들이 몰려든 신대륙이었던 아르헨티나의 항구도시 보카(BOCA). 가난한 이민자들이 고독을 달래기 위해 가던 싸구려 술집, 그들에 기댄 사창가에서 악보도 없이 만들어진 길거리 음악이 탱고의 시작이었다. 여자 파트너를 구할 수 없어 남자들끼리 부둥켜 안고 춤출 때, 깨진 술병에서 흘린 술처럼 나오던 음악이었다. 빈민가에서 태어나 탱고의 리듬을 몸에 감으며 성장했던 피아졸라.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이민 간 부모는 그의 음악 재능을 알아보고 클래식을 접하게 한다. 작곡 콩쿠르에서 1등을 거머쥔 피아졸라는 프랑스 유학 기회를 얻어 스승 나디아 블랑제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나디아 블랑제는 조지 거슈인, 레너드 번스타인, 다니엘 바렌보임 등 걸출한 음악가를 이끈 위대한 음악 교육자. 고국에서는 유망주였으나 유럽 각국에서 온 천재들 사이에서 열등감에 시달리던 피아졸라. 그의 작곡 숙제를 본 스승의 질책은 더 기를 죽였다. ‘이게 뭐야? 이 부분은 스트라빈스키, 여기는 바르토크, 여기는 라벨, 도대체 피아졸라는 어디 있는 거야?’ 다 포기하고 돌아가야겠다 생각한 피아졸라가 막가는 심정으로 피아노를 퉁탕댄 것이 탱고선율이었고 이 소리가 스승의 귀에 닿는다. ‘어떤 음악인가’ 묻는 스승의 질문에 피아졸라는 또 한 번의 질책을 예상하며 답한다. ‘고국에 있을 때 생계 때문에 나이트 클럽에서 연주하던 탱고’라고. 스승 나디아 블랑제가 소리친다. ‘그게 바로 너야! 탱고가 바로 너야! 그걸 해!’ 길거리 싸구려 음악 탱고가 세계인의 월드뮤직으로 탄생하게 될 것을 예고하는 순간이었다.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5월이면 이 땅 곳곳에 울려 퍼질 ‘5월의 노래’를 애국가로 부르면 어떨까. 이 땅 곳곳에서 들고일어날 이들과 퍼부어질 독설이 예상된다. 광주 민주화운동을 기념해 만들어진 이 노래는 극우 쪽에서 ‘운동권, 종북좌파 선동가’라고 오랫동안 매도했다. 1997년, 김영삼 문민 정부가 들어서면서 5.18 기념식에서 불리기 시작했으나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 다시 하대 당했고 문재인 정부 들어 다시 입지를 세우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극우 쪽에서 이 노래를 싫어하는데는 ‘국가전복세력인 빨갱이 노래’라서 말고도 적나라한 가사에도 이유가 있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흩어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어쁜 너의 젖가슴/ 왜 쏘았지왜 찔렀지 트럭에 실려 어디 갔지/ 망월동에 부릅뜬 눈, 수천 개 핏발 서려 있네/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진보 쪽에서도 이 노랫말이 미래의 희망과 국민화합을 담아야할 애국가에는 맞지 않는다 할 듯싶다. 그렇다면 아래 노랫말은 어떤가. .....우리에 대항하여 압제자의 피 묻은 깃발이 일어났도다/ 들리는가 저 들판의 흉포한 적들이 우리 아내와 아이들의 목을 따기 위해 으르렁대는 소리가/ 무기를 들라 시민들이여 대열을 갖추라/ 전진하라 전진하라 놈들의 더러운 피로 우리의 밭고랑을 적시도록..... 라 마르세예즈(La Mrseillaise), 프랑스 국가 중 일부분이다. 이 노랫말을 문화의 나라, 프랑스 아이들이 학교에서 해맑게 합창하는 모습이 상상 가는가. 프랑스는 자신들의 애국가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고 바꿀 생각이 추호도 없다. 이 노래가 자유, 평등, 박애라는 구호로 전 세계인의 가슴을 뛰게 한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민중과 조국을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나선 마르세유 의용병들의 진군가였으니 호전적이고 선동적일 수 밖에 없다. 프랑스 혁명 성공 이후 라 마르세예즈는 유럽의 자유주의, 좌익 계열 어디서든 불리웠다.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 중에도 라 마르세예즈가 국가처럼 불렸다. 우리 나라에서도 1919년 3·1혁명 당시 개성지방 여학생 200여명이 이 노래를 부르며 시위 벌였다는 기록이 프랑스 신문 ‘알제의 메아리’에 남아있다. 1967년, 영국 BBC의 사상 최초 세계 위성중계 프로그램 방송 기념곡으로 비틀즈가 만들어 오늘날까지 사랑받고 있는 ‘All You Need Is Love’ 곡 전주에 라 마르세예즈가 나온다. 노래 뿐 아니라 영화에도 라 마레세예즈가 인상적으로 나왔다. 2차 대전이 배경인 흑백영화 ‘카사블랑카’에 술집에서 거만하게 구는 독일 군인들과 손님들과의 긴장 상황이 나온다. 견디다 못한 손님 모두 일제히 일어나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는데 뭉클한 장면이었다. 오늘날에도 프랑스 혁명정신이었던 자유, 평등, 박애에 연대하는 곳이면 민중시위현장, 오페라 무대, 경기장... 세계 어느 곳에서든 라 마르세예즈가 울려 퍼진다. 혁명의 상징, 프랑스의 자부심, 세계인의 애창곡이 된 라 마르세예즈의 예를 보며 ‘‘5월의 노래’를 애국가로 상상하는 것이 그렇게 말이 안되는 일일까. 엄숙한 애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제 2의 에디트 피아프라 불리는 미레유 마티외(Mireille Mathieu)의 목소리로 들어보시라. 한 나라의 국가가 세계인의 애창곡이 된 이유가 더해진다. (인터넷창에서 www.월드뮤직.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무심히 따라 불렀던 노래의 본뜻을 알고 놀라는 경우가 많았다. 라 쿠카라차가 대표적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교과서에 나온데다 방송을 많이 타서 가사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병정들이 전진한다/ 이 마을 저 마을 지나/소꿉놀이 어린이들/ 뛰어와서 쳐다보며 싱글벙글 웃는 얼굴/ 병정들도 싱글벙글/ 빨래터의 아낙네도 우물가의 처녀도 라 쿠카라차 라 쿠카라차 아름다운 그 얼굴 (후략) 라 쿠카라차(La cucaracha)는 스페인어로 바퀴벌레라는 뜻. 원뜻을 붙여 보면 ‘바퀴벌레 바퀴벌레 아름다운 그 얼굴’ 이렇게 부른 셈이니 황당하고 우습다. 그러나 ‘바퀴벌레’가 가사 속에 들어간 사연을 알고 나면 웃음은 쏙 들어간다. 사연은 우리나라 못지않게 격동의 과거사를 가진 멕시코를 알아야 이해된다. 마야문명과 아즈텍, 찬란한 고대 문명의 발상지였던 멕시코는 1521년, 스페인에 정복 당하면서 300년간 식민통치 받는 굴욕을 겪는다. (라 쿠카라차는 원래 스페인 민요로 스페인 상륙과 함께 전래되었다.) 1821년, 독립했지만 미국과의 전쟁에서 져 영토를 대거 빼앗기고 오스트리아의 통치를 받는가 하면 외국자본, 대지주와 결탁한 부패한 정부에 의해 노동자, 농민의 삶이 파탄지경에 이르는 등 험난한 역사가 이어진다. 결국 1910년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민중혁명이 일어난다. 멕시코 전래 뒤 여러 노랫말로 불리던 ‘라 쿠카라차’는 혁명 당시 농민군들이 만든 노랫말로 퍼져나갔다. 한 남자가 한 여인을 사랑하네/ 그러나 그 여인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네/ 그것은 마치 대머리가 큰길에서 주운/ 쓸모없는 빗 같은 것이라네/라 쿠카라차 라 쿠카라차/ 걸어서 여행하고 싶지 않네/가진 게 없기 때문이라네/ 오 정말 가진 게 없다네/ 피울 마리화나도 없다네...(중략)....누군가 나를 미소 짓게 하는 사람/ 그는 바로 셔츠를 벗은 판초 비야라네/ 카란사의 군대는 벌써 도망가 버렸네/ 판초 비야의 군대가 오고 있기 때문이라네...(후략) 노래는 뒷부분에 나오는 ‘혁명영웅 판초 비야’를 칭송하고 혁명을 예찬하고자 지어진 것인데 엉뚱하게 실연한 남자, 여인세평(世評)을 앞부분에 늘어놓은 것은 생사가 오가는 혁명전장에서 은밀하게 불렀기 때문 아닐까 싶다. 판초 비야의 삶은 가슴 아프다. 1878년,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부모를 일찍 여윈 뒤 농장일꾼으로 살던 비야는 누이동생을 강간한 농장주를 살해한 뒤 산속으로 도주, 의적이 된다. 혁명 발발 후 게릴라전에 참여, 신출귀몰한 전투실력으로 농민혁명군 총사령관이 되고 혁명 후 대통령 후보에까지 올랐지만 정적에게 암살 당해 파란만장 삶을 마친다. 라 쿠카라차, 뜬금없이 바퀴벌레란 단어는 왜 들어갔을까. 바퀴벌레처럼 비참한 삶을 사는 멕시코 민중을 표현했다는 설, 멕시코 전통의상 판초우, 솜브레 차림의 농민혁명군 대열이 떼지어 가는 바퀴벌레 같아 붙였다는 설, 농민혁명군의 10년간의 항쟁이 질긴 생명력의 바퀴벌레 같아 붙였다는 설 등이 있다. 그 뜨거운 멕시코 민중혁명가가 지구 반대편으로 날라와 명랑한 국군찬양동요로 번안돼 불린 것을 생각하면 바퀴벌레 노랫말보다 더 황당하지 않은가. (인터넷창에서 www.월드뮤직.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월드뮤직 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오래 강의해왔지만 내 강의의 대부분은 음악과 음악인 이야기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역사 강의로 샐 때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쿠바의 관타나메라’ 를 소개할 때다. 중,노년층의 관심이 늘 뜨겁다. 그들은 70년대 3인조 그룹 세샘 트리오(‘나성에 가면’을 히트 시킨)의 목소리로, 청춘시절에는 미국 조앤 바이즈, 호세 펠리치아노의 노래로 만났던 관타나메라를 추억 속에서 호출한다. 흑백 사진첩 넘기듯 아련한 눈빛이 된다. 노래 속 여인의 고향, 황백색 꽃 피는 종려나무 무성한 지구 반대편 섬 관타나모의 풍광을 전하면 ‘죽기 전에 언제 한 번 가보나’ 하는 동경의 눈들로 빛난다. 그러다 노랫말의 주인공, 쿠바 혁명가 호세 마르티 이야기를 하면 노래 이미지 반전에 충격 받는다. 그제서야 현실로 돌아와 미군 주둔 관타나모 기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알카에다 포로 수용소, 혹독한 고문 등의 뉴스를 떠올린다. 지금은 수교국이지만 60여년간 적국이었던 미국 포로수용소가 왜 쿠바 땅 관타나모에 있는지부터 질문이 쏟아진다. 관타나모의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500년 전으로 돌려야 한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이곳 관타나모에 상륙한 이후 스페인령이 되었고 400년 굴욕의 식민역사가 시작된다. 그 땅 위쪽에서 군침 흘리고 있던 젊은 미국은 1898년, 자국 군함 침몰 자작극으로 스페인과 전쟁을 벌인 끝에 승리해 쿠바에 대한 모든 권리를 넘겨받는다. 쿠바는 3년간 미군정 통치를 받은 끝에 1902년 독립을 이루지만 미국이 우월적 지위를 이용, 쿠바헌법에 집어넣은 ‘플랫 수정안’으로 오늘날까지 발목을 잡히고 있다. 수정안 중에는 ‘미국의 해군기지를 쿠바 땅에 만드는 것을 합의’하다는 조항이 있었는데 ‘양국이 합의해야만 파기할 수 있다’는 독소조항으로 사실상 영구적 미국 식민지가 된 지역이 있었으니 바로 관타나모다. 그 협정에 의해 미국이 냈던 당시 임대료는 연 2000달러. 1934년 재협정으로 4085달러로 올렸지만 말이 되는가. 우리나라 서울시 면적 1/6이 넘는 땅을 말이다. ‘남의 나라 땅’ 문제였던 관타나모에 세상의 이목이 쏠린 것은 2001년, 미국이 그곳에 지은 포로 수용소에서 행해진 악랄한 고문이 폭로되면서다. 오바마가 미국의 수치라며 수용소 폐지를 공약했으나 지키지 못했고 그래서 비극은 현재진행형. 2006년, 반짝 나왔다 사라진, 불모의 사막에 피어난 꽃 같은, 그래서 기적 같은 뉴스를 기억한다. 관타나모의 수용소 포로들의 시집이 세상 밖에 나온 것이다. 치약을 잉크 삼아, 스티로폼을 종이 삼아 숨어 쓴 22편의 시가 ‘관타나모에서 보낸 시: 수감자들이 말한다’ 라는 제목으로 나온 것이다. 시 하나하나가 유언 같다. 내 피를 가져가요/ 무덤에 외롭게 누운 내 주검/ 사진을 찍어 세상을 향해 보내주오/ 재판관들에게/ 그리고 양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들이 죄의식의 짐을 지도록/ 아이들과 역사 앞에서/ ‘평화의 수호자’의 손에 고통 받는 이 영혼에 대해 (바레인 청년 주마 알두사리(33)/ 테러 용의자로 수감) 포로 시인들의 고백 중에 ‘시가 없었다면 미쳤을 것’이라는 말이 오래 울린다. 그들 이전에 관타나모를 무대로 한 시로 명곡 관타나메라를 탄생시킨 호세 마르티. 전 생애를 나라의 독립에 바친 혁명가 마르티가 시를 놓지 않은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인터넷에서 www.월드뮤직.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파주 헤이리의 내 작업실을 찾아온 친구가 ‘기분이 울적하니 아무 생각 없이 들을 수 있는’ 풍악을 대령하라기에 경쾌한 월드뮤직 음반을 골라 들려줬다. 두 세곡 뒤 쿠바 민요 ‘관타나메라’ 가 나온다. 제목만으로 바로 후렴구를 떠올리게 하는 노래다.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나메라~’ 맞다. 그 노래. ‘호세 마르티 생각하면 이 노래를 목록에서 빼야 하는 거 아니야?’ 역사교사답다. 밝은 노래에서 어두운 역사를 바로 잡아낸다. 말 나온 김에 질문했다. ‘체 게바라는 유명한데 체 게바라의 영웅이었던 호세 마르티는 왜 그렇게 안 알려졌을까?’ 민중시각 역사교육, 세계시민의식 부재 이상의 탁견을 청했던 내 진지한 질문을 무색하게 한 답변. ‘외모 차이 아닐까’ 진심인지 유머인지 아직 확인 못해봤다. 호세 마르티는 몰라도 관타나메라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국정 음악 교과서에도 실렸으며 마리카스같은 전통 남미 악기를 흔들며 노래하는 모습으로 방송도 많이 탔다. 노랫말을 모르고 들으면 리듬이 경쾌하고 중독성 있어 ‘휴가지에서 들으면 딱 좋을 노래’ 정도로 느껴진다. 제목 ‘관타나메라’도 ‘관타나모에 사는 여인’이란 뜻이니 가볍다. 그러나 스페인어 가사를 번역해 들여다보면 반전이다. 나는 진실한 사람/ 야자수 무성한 고장 출신/ 죽기 전에 이 가슴에 맺힌 시를 노래하리/ 내 시는 화창한 초록색/ 내 시는 불타는 선홍색/ 내 시는 상처 입은 사슴/ 산 속 보금자리 찾는/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이 한 몸 바치리라 세상불의를 향한 총구를 품은 가슴, 그 가슴들을 모아 세상을 뒤엎고자하는 결기가 읽힌다. 노랫말은 (내 역사교사 친구가 아는 척한) 쿠바의 호세 마르티(1853-1895)의 시에서 나온 것. 체 게바라처럼 마르티도 시인이면서 혁명가였다. 1853년, 스페인 식민 통치 하의 쿠바 아바나에서 태어난 마르티는 16세부터 독립운동을 시작, 다음 해인 17세 때 6년 옥고를 치른 뒤 추방까지 당한 ‘운동권 영재’였다. 국외자로 떠도는 중에도 쿠바혁명당을 창당한 뒤 고국에 잠입, 독립전쟁에 참전했으나 1895년 도스리오스 전투 중 사망한다. 마흔을 갓 넘긴 나이였다. 마르티가 이루고자 한 혁명은 그의 시 속에서도 타올랐다. 쿠바의 독립뿐 아니라 인종과 계층을 초월한 세상을 꿈꾸었다. 쿠바를 넘어 라틴 아메리카 민중의 사랑을 받는 이유다. 사후 쿠바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 마르티의 인기는 체 게바라 못지않다. 아바나 국제공항 이름도 호세 마르티 공항이고 지폐, 거리, 광장, 학교..... 어디가나 그의 이름을 만난다. 체 게바라 베레모에 달린 별도 피델 카스트르가 ‘호세 마르티의 별’이라며 달아준 것이다. 실상 청년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 두 사람이 혁명전선에 뛰어드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쿠바 국민들이 호세 마르티를 사랑하는만큼 관타나메라도 애국가 다음으로 자주 불리는 곡이 됐다. 그러나 관타나모 지역의 역사를 생각하면 마르티의 저 세상에서의 한숨소리가 들린다. 그 곡절은 다음 편에 계속 된다. (인터넷창에서 www.월드뮤직.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일곱 번 본 영화가 있다. ‘인생은 짧고 볼 영화는 넘쳐난다’고 생각하는 내겐 이례적이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개봉된 1962년 미국의 줄스 다신 감독이 만든 흑백영화 페드라(Phaedra)다. 라디오 심야방송을 즐기던 청소년 시절, 배경음악으로 처음 만났던 페드라는 강렬했다. DJ는 ‘남주인공이 사랑이 추락하자 인생도 추락하는 장면의 음악’이라고 소개했는데 바하의 파이프 오르간 음악 ‘토카타와 푸가’가 흐르는 가운데 절규에 가까운 독백이 나온다. (너무 많이 들어서 외워버렸다. 물론 영어다) ‘가자, 달리자! 바하의 음악을 들으며 추방되는 것도 영광이지 오, 세바스챤 바흐! 라라라~~ 굿 바이, 페드라, 그녀는 날 사랑했어. 죽고 싶어. 이제 스물 네 살, 라라라~’ 대학을 졸업하고 몇 해 뒤 종로의 한 영화관에서 재상영한다는 소식을 듣고 첫날 첫회를 예매해 보았다. 엔딩 자막이 뜨고 관객 모두가 나간 뒤에도 혼자 감전돼 앉아있던 기억이 마치 유체이탈해 내려다본 듯 생생하다. 그리스 신화인 파이드라와 히폴리투스 비극에서 따온 계모와 의붓아들간 금기의 사랑 이야기도 강렬했지만 이를 맡은 여주인공 페드라(멜리나 메르쿠리 扮)의 이 세상 여자 같지 않은 아름다움과 아우라, 서른 넘은 그녀를 사랑의 지옥으로 몰고 간 스물 네 살 청년 알렉시스(안소니 퍼킨스 扮)의 순수와 매혹의 교차가 혼을 빼게 했다. 격정을 더한 것은 귀기 서린(그런 목소리가 그리스 여성 성악계에서는 최상급이라나)페드라의 노래를 포함한 영화의 배경음악들이었다. 작곡자는 그리스 음악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 kis Theodorakis).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의 배경음악도 만들었고 부주키 선율이 애잔한 세계적인 명곡 ‘기차는 여덞시에 떠나네’의 작곡자이기도 하다. 그의 삶은 격동의 그리스 현대사와 따로 이야기 할 수 없다. 1830년 터키로부터 독립했지만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에 점령 당했고 종전 후에도 공산주의 세력과의 내전, 군사독재의 홍역을 치뤘으며 2010년 국가부도 위기로 IMF 구제금융을 받았던 그리스. ( 우리 역사와 상당히 닮았다. 위치도 우리나라처럼 북위 38도!) 세계 2차 대전 때 레지스탕스에 가담, 나치에 항거했던 테오도라키스는 60년대는 군부독재에 맞서 옥살이를 치뤘고 70년대는 망명생활을 해야했다. 그의 모든 곡들은 금지곡이 됐다. 그저 사랑과 이별노래로 알았던 ‘기차는 8시에 떠나네’도 알고보니 그런 삶에서 나온 곡이다. 2차 대전 때, 한 청년 레지스탕스가 나치에 맞서기 위해 민병대 집결지인 카타리나로 떠나게 되자 그의 연인은 기약 없는 그를 애타게 기다리게 되었다는. ‘카타리나행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겨울의 짧은 낮은 사라지고 창백한 달이 뜨네/ 그대 검은 눈에 키스를 얹네/ 지금은 헤어질 시간/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사람/ 카타리나행 기차는 8시에 떠나네 ...중략...머리를 짧게 자르고 립스틱을 지우리/ 검은 곳을 입고 마음의 문도 닫으리/ 지금은 헤어질 시간/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사람/ 11월은 영원히 내게 남으리/ 기차는 8시에 떠나네’ 예술도 예술가의 삶을 담는다. 테오도라키스의 모든 음악이 아름다움을 넘어 숭고하게 느껴지는 이유를 알겠다. ‘기차는 8시에 떠나네’는 아그네스 발차(Agnes Baltsa)의 목소리가 역시 최고다. 페드라의 배경음악은 영화를 알아야 더 가슴을 파고든다. 유튜브를 통해 볼 수 있다. 중독은 책임 못진다. (인터넷창에서 www.월드뮤직.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미얀마 참상 소식 하나가 종일 뒷덜미를 잡는다. 지난 14일, 미얀마 양곤의 시위 도중 한 남성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죽여도 좋다는 군부의 지령을 받은 경찰의 총탄이 계속 쏟아진다. 돌연 물러나는 시위대 속에서 한 여성이 뛰어나와 남성의 몸을 감싼다. 이십 대 청춘이었다. 양곤 의대 1학년이라는 남성도, 생면부지 남성을 위해 총탄을 뚫고 몸을 던진 여성도. 남성은 주검이 되어 돌아왔고 여성은 경찰에게 두들겨 맞으며 끌려가 소식이 없다. 어리고 여린 그들을 총탄 세례 앞에 서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질문에서 답을 얻는다. 어리고 여린 것이 힘이었을 것이다. 혁명가하면 만인을 이끄는 카리스마, 불굴의 정신 같은 것을 떠올리기 십상인데 세상에 이름 얻은 혁명가들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게 다는 아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 ,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 때문에 젊은 날 괴로워하는 이야기가 많다. 시인의 마음과 닮았다. 실상 시인들 가운데 혁명전선에 섰던 이가 적지 않다. 우리나라 시인으로는 김남주, 박노해, 김지하가 떠오르고 나라 밖으로는 혁명대열에 동참하다 정치적 망명까지 해야 했던 칠레의 민중시인 파블로 네루다, 스무 살 전후 시인을 꿈꿔 시인클럽에서 활약했다는 독일의 칼 막스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체 게바라! 시심이 혁명가를 만든 대표적 인물이 아닐까.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이 세계의 모순을 먼저 치료하리라’ 고 의학도에서 혁명가의 삶을 택한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을 성공시킨 뒤 남미전역과 아프리카 혁명을 위해 다시 혁명가의 길을 떠났던 그는 볼리비아에서 생포돼 처형된다. 그의 나이 서른 아홉이었다. 사후 발견된 배낭 속에는 69편의 시가 들어있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게릴라 활동 중에 좋아했던 시인들의 시를 필사한 것이다. 파블로 네루다, 세사르 바예호, 니콜라스 기옌, 레온 펠리페의 시들. 유품에서는 또 딸의 탄생을 기념해 지어준 시, 아내를 위해 시를 녹음한 테이프 등도 나왔다. 혁명가이면서 사랑하는 아내의 기다림, 여섯 아이에 대한 정 때문에 괴로워한 인간이었다. 그의 사후 쿠바 작곡가 카를로스 푸에블라가 노래를 만들어 헌정한다. 체 게바라 편지 속의 ‘승리의 그날 까지 영원히’란 글에 응답이라고 한다. 그대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았네/ 역사의 현장에서 배웠네/ 그대 용기가 불타오를 때/ 죽음도 막을 수 없었네/ 깊고 투명한 그대 모습이 점점 또렷이 남았네/ 우리의 사령관 체 게바라/ 영광스럽고 강한 그대 손이 역사를 향하면/ 산타클라라의 모든 이들이 그대를 보기 위해 깨어나네 ......우리는 뒤따라 가리/ 그대가 함께 그랬듯이 / 피델과 함께 그대에게 외치네 /그대는 영원한 우리의 사령관 가사는 장중하지만 멜로디는 너무 아름답다. 베네수엘라 저항 가수 솔레다드 브라보(Soledad Bravo)의 목소리로 들어보기 권한다. (인터넷창에서 www.월드뮤직.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택시 안에서 오랜만에 가곡 ‘비목’을 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처연한 가락, 시 같은 노랫말에 끌려 즐겼던(?) 노래인데 지어진 사연을 알고 쉽게 부를 수 없는 노래가 됐다. 1960년대, DMZ 주변을 수색하던 육군 소위가 무덤 하나를 발견한다. 돌무덤 앞, 나뭇가지로 세운 비(碑) 위에 녹슨 철모가 걸려있었다. 6.25 전쟁의 포화 속에 스러진 한 청춘이 첩첩산골 잡초 속, 이름도 없이 비목으로 남은 것을 보고 가슴 아팠던 소위. 훗날 방송국 음악 PD로 재직 중 그때의 심정을 떠올려 노랫말을 만든다. 비목 작사가 한명희(82) 전 국립국악원장 이야기다. 전쟁과 무명용사 애사(哀史)가 우리나라에만 있었겠는가. 비목을 떠올리게 하는 월드뮤직이 몇 곡 있는데 ‘백학’(Cranes)이 대표적이다. 우우우우우~ 우우우우우~ 하는 육성 섞인 전주를 들으면 중년 이상 세대 상당수 사람들은 이 노래를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백학을 주제곡으로 썼던 이십여년 전 드라마 ‘모래시계’를 떠올릴 것이다. 70년대, 80년대를 소환해 5.18광주, 삼청교육대, YH사건 등 엄혹했던 시대를 다룬 드라마의 장중함과 비극성을 살리는데 배경음악이 한몫 했다. 그런데 노래 부른 이오시프 코브존(Iosif Kobzon 1937- 2018)이 러시아 가수여서 그런지 러시아 민요라고 언론에 나왔다. 이를 정정한답시고 나온 기사들도 오보가 적지 않았다. ‘인종문제로 갈등 빚어온 체젠 국민들의 한 서린 민족음악이다’ 는 내용이 대표적이다. 실제 작사자는 러시아 남부 다게스탄 자치 공화국 출신의 시인 라술 감자토프(Rasul Gamzatov,1923-2003)다. 시인은 세계 2차대전 중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했다. 소련군과 나치 독일군간 벌어진 전투로 양측 사상자가 200만명이나 나온 2차 대전 최대의 유혈 전투였다. 인육까지 먹으며 버티던 참혹한 격전 끝에 결국 동토의 시체로 뒹구는 전우들을 본 라술 감자토프의 심장에서 한 편의 시가 솟는다. 이 시는 60년대 영화 ‘스탈린그라드’의 배경음악 노랫말로 재탄생해 러시아의 국민가요로 불린다. 나는 가끔 병사들을 생각하네/ 피로 물든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한 병사들이/모국 땅에 묻히지 못하고/ 백학이 된 듯하여/ 그들은 예로부터 하늘을 날며/ 우리를 부르는 듯 하네...(중략)....날아가네 저무는 하루의 안개 속을/ 무리 지은 대오의 작은 틈새/ 그 자리가 나의 자리는 아닐까/ 그날이 오면 학들과 함께/ 푸른 아지랑이 속을 끝없이 날아가리/ 대지에 남겨둔 그대들의 이름자를/ 천상 아래 새처럼 목놓아 부르면서 반만년 고난의 역사를 돌아보면 전쟁 없고 굶주림 없는 지금 이 시대가 특별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남북분단의 현실이 있어 태평성대라 할 수는 없다. 나라밖 지구촌 곳곳에는 분쟁과 압제로 인한 민중의 수난이 여전하다. 세계 대전에서 시로 비목을 세운 추모곡 백학이 먼 과거, 먼 나라의 노래일 수 없는 이유다. 백학은 이오시프 코브존의 목소리도 좋지만 그리스 여가수 해리스 알렉시우(Haris Alexiou)가제 나라말로 부르는 노래도 추천한다. (인터넷창에서 www.월드뮤직.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오월은 멀었는데 ‘임을 위한 행진곡’ 이 들린다. 노랫말의 모태가 된 시 ‘묏비나리’를 지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세상을 떠났다. 평생을 노동자, 빈민의 편에 서서 독재와 싸우고 통일 운동에 헌신했던 그의 족적이 노래의 장엄함을 더한다. ‘민중의 애국가’가 된 이 노래는 국경을 넘어 미얀마, 태국,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등 독재와 탄압에 맞서는 시위현장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아이돌 가요처럼 한류를 만든 민중가요다. 2년 전, 홍콩시민의 범죄인 송환 법안 반대 시위 현장에서도 불렸던 이 노래를 두고 한 신문은 ‘임을 위한 행진곡은 아시아 각국에서 불리는 스텐카 라진(Stenka Razin)’이라고 소개했다. 스텐카 라진도 낯선 단어지만 임을 위한 행진곡과는 또 무슨 관계일까. 스텐카 라진은 70년대 대학을 다닌 이들의 시위 현장에서, 더 멀리 가면 광복 전 독립군들 사이에서 불렸던 러시아 민중가요로 17세기 중반의 러시아 농민반란 지도자 이름이다. 우리나라 동학혁명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 같은 존재이기에 그를 기린 민중의 노래 ‘새야 새야 파랑새야’와도 비견된다. 러시아 남동쪽 국경지방인 카자크(Kasak)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스텐카 라진은 차르 폭정 하에 고통 받던 농민들 편에 서서 1만 여명의 대규모 농민군 항쟁을 이끌었다. 그러나 동지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에서 처형 당한다. 분기탱천한 황제 지시로 산채 팔, 다리, 머리를 잘리며 죽어가는데 그 과정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아 살아서 영웅, 죽어서 신화가 되었다. 영웅의 신화는 수많은 노래로 만들어져 퍼진다. 그 중 가장 널리, 오래 불리고 국경을 넘어 퍼져 오늘날까지 무대에 오르는 곡이 이 노래다. 그런데 노랫말 속에는 영웅 아닌 인간 스텐카 라진의 충격적 사연이 들어있다. 넘쳐 넘쳐 흘러가는/ 볼가강 물 위에/ 스텐카 라진 배 위에서/ 노랫소리 들린다/ 페르시아 영화의 꿈/ 다시 찾은 공주의/웃음 띤 그 입술에/노랫소리 드높다/ 동편 저쪽 물 위에서/ 일어나는 아우성/ 교만한 공주로다/ 우리들은 우리다/ 다시 못 올 그 옛날의/ 볼가강물 흐르고/ 꿈에서 깬 스텐카 라진/ 장하도다 그 모습 페르시아 영화, 다시 찾은 공주라니? 설명이 필요하다. 스텐카 라진을 믿고 봉기한 농민군의 세는 무섭게 불어나는데 이들을 이끌 식량,물자가 태부족했다. 반란군은 주변 국가까지 쳐들어가 전리품을 챙겨왔는데 그 과정에서 페르시아 공주를 인질로 끌고 온다. 문제는 스텐카 라진이 아름다운 공주에 혹해 사랑에 빠진 것. 이를 알게 된 농민군들의 분노는 당연지사. 정신을 차린 스텐카 라진은 볼가강 뱃전에서 강물 위로 공주를 던져버리고 전의의 칼날을 다시 세웠다나. 창졸지간 인질로 끌려가 황당하게 수장 당한 페르시아 공주의 삶은 거대영웅서사를 빛내는 소재로 쓰였다. 오늘날 같으면 절대 만들어질 수 없는 노래리라. 우즈베키스탄 가수 안나 게르만(Anna German)의 노래가 아름답기는 하지만 노래맛은 러시아의 베이스 가수 보리스 쉬토크로프(Boris Shtokolov)의 목소리가 좋다. (인터넷창에서 www.월드뮤직.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에 전 생애를 드러내는 사람이 있다. 지구 반대편 나라의 가수, 칠레의 빅토르 하라(1932- 1973) 이야기를 하려한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월드뮤직을 접하기 전 먼 바람을 타고 전설처럼 흘러 내 귀를 스쳐갔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 때 청춘을 보냈는데, 우리처럼 군부독재탄압에 신음하던 칠레에 민중가수 김민기같은 존재가 있다더라는 이야기를 들었었고 20여년 전 체 게바라 열풍이 불어 거리에 그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젊은이들이 넘치던 때, 어느 술자리에서인가 ‘칠레에도 체 게바라같은 대단한 존재가 있는데.....’는 말이 오갔던 기억이 있다. 월드뮤직에 빠지면서 다시 한 번 그 이름을 접했고 노래를 찾아 듣던 중 유독 가슴에 꽂히는 곡을 만났다. ‘Manifesto’(선언). 감미로운 기타 전주 후에 나오는 미성의 달콤한 목소리....라고 하기에는 저변을 흐르는 슬픔. 회환이 가슴을 파고 들었다. 내가 노래하는 것은 목소리가 좋아서, 노래하기 좋아서가 아니지/내 기타도 이성과 감정이 있기 때문이야/내 기차는 대지의 심장과 비둘기의 날개를 갖고 있어/마치 성수와 같이 기쁨과 슬픔을 축복하지(중략)내 기타는 돈 많은 자들의 기타가 아니야/내 노래는 저 별에 닿는 발판이 되고 싶네/의미를 지닌 내 노래는 고동치는 핏줄 속에 흐르지/노래 부르며 죽기로 한 사람의 참된 진실들..... 은유 가득한 가사는 노래를 낳은 삶을 궁금하게 했다. 칠레 산티아고의 빈민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연극과 음악에 소질을 보여 예인으로 성장한 하라. 그러나 그가 가수로서 두각을 보인 60년, 70년대의 남미는 외세의 탄압과 군부독재정권의 압제로 민중의 삶은 참혹했다. 하라는 민중음악가수 선발대회인 누에바 칸시온(Nueva Cancion) 페스티벌에 참여, 1위를 차지하면서 민중가수로 이름을 굳힌다. ‘나의 기타는 총, 나의 노래는 총알’ 이라 외치며 외세, 독재와 노래로 싸우던 하라는 70년, 남미 최초로 국민선거에 의해 당선된 민중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의 음악대사로도 활약한다. 아옌데 정부는 토지개혁, 남녀동일임금, 전국민 생활임금제, 공교육 보장, 아동무상급식제등 민중우선정책과 외세의 압력에 과감히 맞서는 강경책등으로 국민의 환호를 받았다. 그러나 미국을 등에 업은 부하 피노체트는 쿠테타로 대통령을 폭격사망하게 하고 시계를 거꾸로 돌려버린다. 군부는 쿠테타를 반대한 유명 인사는 물론 저항 시민들을 칠레 종합운동경기장으로 끌고 가 수천 명을 총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빅토르 하라도 그 총구에 스러지는데 뒷날 참혹한 죽음의 실상이 전해진다. 군인들은 하라의 손목과 손가락을 부러뜨린 뒤 ‘노래하고 기타를 쳐보라’고 조롱했다. 하라는 굴하지 않고 그들 앞에서 민중을 위한 노래 Venceremos(승리하리라)를 불렀다. 분개한 군인들은 하라의 혀를 자른 뒤 마흔 네발의 총탄을 퍼부어 절명에 이르게 한다. 노래가 운명을 만든 것일까. 그는 자신의 노래 ‘선언’에 나오는 ‘노래 부르며 죽기로 한 사람’이 되었으며 죽음으로 ‘참된 진실’을 보여주었다. 마흔 살 나이였다. 오욕칠정에 흔들릴 때마다 위대한 인물의 전기를 읽는다는 작가를 알고 있다. 나는 빅토르 하라의 노래를 찾아 듣는다. 부끄러워지고 정신이 번쩍 든다. 자주 찾아듣는 노래는 하라의 Manifesto(선언) 말고도 La Plegaria a un Labrador(한 노동자에게 바치는 기도), Zamba Del Che(체를 위한 삼바),Concion Del Arbol Del Olvido(망각나무의 노래) 등이다. (인터넷창에서 www.월드뮤직.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노래를 듣다 가사가 쏜 살에 심장에 명중돼 숨 못 쉬는 체험을 한 적이 있는지. 월드뮤직 중에 노랫말이 기가 막힌 곡이 적지 않다. 오늘 소개할 아르헨티나 가수 메르세데스 소사(Mercedes Sosa)의 ‘그라시스 아 라 비다(Grasias A la Vida)’ 도 그 중 하나다. 월드뮤직과 친해지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언어다. 월드뮤직은 지구상 200개 넘는 나라의 7천개가 넘는다는 언어와 만나는 일이기도 해서 가사해석이 안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월드뮤직과의 첫 만남의 호불호는 음률, 가수의 목소리, 노래 분위기같은 것에서 비롯된다. 그건 가수와 음률이 마음에 안들면 바로 내쳐진다(?)는 얘기기도 하다. 월드뮤직에 빠지기 시작한 20여년 전 내 모습이기도 하고 그 초자의 거름망에 걸려 빠져나갈 뻔했던 위대한 곡이 있었으니 바로 앞에 언급한 소사의 노래다. 귀에 익은 듯한 음률도 살짝 씩씩한 목소리도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그래서 패스. 그런데 나보다 앞서 월드뮤직에 빠져 전문가가 된 분들의 책을 보니 그녀의 노래에 대한 상찬이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찾아 듣게 됐고 가사도 알게 됐다. 기억난다. 청춘을 막차에 태워 보내고 사랑도 일도 다 실패해 연옥을 해매던 중이었다. 노래 가사를 컴퓨터 창에 띄워 본 곳은 여행 중 시외버스 정류소 근처 탁자 네 개 둔 작은 찻집이었다. 일절도 읽어내리기 전, 눈물 둑이 터졌다. 손님이 나뿐이라 다행이었다. ‘그라시아스 아 라 비다’라는 스페인어 제목은 ‘생에 감사하며’라는 뜻. 인생이여 고마워요/ 이렇게 많은 것을 베풀어주어서/ 나에게 준 두 개의 밝은 별/ 그것을 알면/ 흑과 백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으니까/ 높은 하늘 깊이 별들이 보이고/사람들 속에 내가 사랑하는 이가 있네요...중략....인생이여 고마워요/웃음을 주고 눈물을 주어서/그래서 행복과 슬픔이 구별되고/내가 노래를 만들 수 있게 하고/ 그 노래는 당신들의 노래, 모두의 노래, 나 자신의 노래/ 인생이여 고마워요 지면 관계상 전 가사를 소개할 수 없어 안타깝다. 당시 내 눈물을 뽑게 하며 힘을 준 것은 고진감래 정도되는 느낌이었을텐데 뒷날 그 눈물이 값싸게 느껴진 것은 ‘전혀 고맙지 않은 인생’을 산 소사의 과거 때문이었다. 1960년대 아르헨티나의 신성(新星)이었던 소사는 유럽까지 진출 ‘ 에디트 피아프 이후 최고의 감동적인 목소리’라는 환대를 받으며 세계적 스타의 발판에 올라섰다. 그러나 소사는 76년에 들어선 군부독재의 폭압으로 3만여명이 실종되고 숱한 민주화 투사들이 죽어가고 있는 고국 아르헨티나의 현실 가운데 뛰어들었다. 노래로 독재를 비판하고 민중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했다. 결국 79년, 공연장에서 350여명의 관객과 함께 체포되었고 강제출국까지 당한다. 그 과정에서 사랑했던 남편은 죽고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된 채 수 년간 여러 나라를 떠돌게 된다. 82년, 군부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몰래 귀국한 소사의 공연은 모두 매진되었는데, 그 공연에서 전 관객을 울린 곡이 바로 ‘그라시아스 아 라 비다’였다. 생전 ‘예술가는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하지만 불의를 외면하는 것은 나를 배반하는 일’이라고 말했던 소사. 세계적인 스타로 부귀영화 누리며 살 수 있었던 소사는 민중의 편에 선 죄로 10년 전, 74세로 삶을 마감하기까지 고통이 9할인 삶을 살다갔다. 소사는 그 칠십여년의 삶을 마감하면서 ‘그라시아스 아 라 비다’를 부를 수 있었을까. 그에 대한 답을 소사와 같은 삶을 살다간, 노래에 혁명을 실었던 월드뮤직 스타들을 만나보며 찾아보는 것을 어떨까. 다음 편에도 이어질 ‘혁명과 노래’를 기다려주시길. (인터넷창에서 www.월드뮤직.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