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나무 /김규은 산사나무 가지에 새 한 마리 내려 앉는다 흔들리는 가지 햇 가지였나 뼛속을 비워낸 저 작은 새의 무게 때문이 아닐 것이다 대기를 가르며 내려앉는 탈력 때문일 것이다 새가 날개를 지탱하는 것은 뼛속을 비워 가벼워지는 일이다 가지가 꺾이지 않는 까닭은 적은 무게에도 무거운 듯 천연스레 반동하는 일인가 보다. ■ 김규은 1941년 전북 부안 출생. 1991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해 시집 <냉과리의 노래> 등을 펴냈다.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 미래시시인회 회장, KBS 아나운서 등을 역임했다.
지구는 돈다 /박주택 지구는 둥글다 둥글다고 한다 심지어 돈다, 돈다고 한다 나는 둥글다는 것이 의아스럽다 저것은 누군가 지은 집 저것은 성곽 저 끝에 보이는 것은 우체국 뛰쳐나가는 것이 미덕인 119ㅡ 모든 것을 녹이는 수평 나는 밖을 가만히 응시한다ㅡ 하늘은 눈이 없다는 생각 지구가 나만 빼놓고 돌지 않아 다행이다 나는 지구에 매달려 있다 나는 달을 보며 다른 행성으로 가는 사람들을 배웅했다 ■ 박주택 1959년 충남 서산 출생. 경희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8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해 『꿈의 이동건축』, 『방랑은 얼마나 아픈 휴식인가』, 『사막의 별 아래에서』, 시론집 『낙원 회복의 꿈과 민족 정서의 복원』, 평론집 『반성과 성찰』, 『붉은 시간의 영혼』, 『현대시의 사유구조』 등을 펴냈으며 현대시 작품상, 이형기 문학상, 소월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마음의 정죄情罪 /이남숙 바다처럼 관대하고 실개울처럼 착하고 꽃망울 부풀어 오르듯 어우러져 살고 싶은데 아슬아슬한 충족감 밑에 울컥 감정의 덫에 걸려 무의식의 전류로 흐르는 한바탕 소나기 퍼 붓듯 황톳물로 쏟아져 내리는 입술의 말들이 너무 밉습니다 불꽃 기운 무질서한 초조한 영혼에 꽃 한 송이 피우고 내 속 모든 찌꺼기 가라앉혀 맑고 고운 포도주가 되길 두 손 모으니 님의 하얀 마음으로 내 영혼 어루만지소서. ■ 이남숙 1945년 경남 남해 출생. 진주교대 방통대초등교육과를 나와 경기대학원 초등교육과를 졸업했다. 『문학 21』로 문단에 나왔다. 시집 『세월의 그림자』, 『축제의 흔적』, 동인지 『풀빛예감』이 있다. 국제문화예술상, 허균허난설헌문학상, 행촌문화고려문학상을 수상했다.
이슬 /김관옥 긴 여름 내내 가을을 기다렸던 귀뚜라미 기댈 곳 없는 마음 허공에 수를 놓는다 그리움으로 가득한 햇살의 수틀 침묵으로 버텨온 돌도 눈물을 터트린다 ■ 김관옥 1939년 전남 곡성 출생. 국제펜광주회원이자 광주문협이사를 맡고 있다. 서석문학작품상, 광주시협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 『변명』. 『집시가 된 물고기』 등이 있다.
목련편지 /전영관 목필(木筆)이 바람의 휘몰이를 따라 초서에서 해서로 운필을 거듭합니다 봄날의 문장들을 습성처럼 받아 적다가 수런거림까지 채록하려 욕심냅니다 봄이 맨발로 바다를 건너오는 자란자란함이 눈부신 오후입니다 도시의 봄이란 전지당한 가로수의 당혹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대문 앞의 사내가 애인의 해사한 얼굴을 기다리는 동안이 봄의 기한이고 블라우스와 맞춤인 립스틱을 고르는 여자의 손길이 봄의 몸짓이라 하겠습니다 새물 올리는 나무에 귀를 댄 적 있는지요 남녘이라면 춘정에 겨운 나비가 는실난실 파도의 몸짓으로 팔랑거리다가 봄이란 모를 것이라고 느른하게 갸웃거리기도 하겠습니다 ■ 전영관 1961년 충남 청양출생. 2011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부르면 제일 먼저 돌아보는』, 『바람의 전입신고』, 산문집 『문장의 무늬』, 『슬퍼할 권리』, 『좋은 말』 등이 있다.
오늘 /박경희 원천(遠川)은 예나 지금이나 흐르는데 어느 날 천변을 따라 길이 놓였다 사람들이 그 길따라 걸었다 나는 근심의 살을 빼려 천변을 걸었다 풀잎배에 실었던 유년의 부푼 꿈들은 물살에 부서져 가뭇하고 입가에 번졌던 소녀의 맑은 미소는 휘돌아감은 물길따라 꼭다문 예순의 입술에 갇혀 있다. 원천(遠川)은 유구히 흐르고 하늘은 열린 가슴이다 ■ 박경희 1961년 전남 나주 출생. 광주교육대학을 졸업해 아주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을 전공했다. 2009년 『한국문인』으로 등단했으며 경기여류문학회와 수원문학인협회 회원이다.
사랑의 플래카드 /권옥희 그래, 여름이 올 때면 한번쯤 사랑을 앓아야지 맨살 같은 목백일홍 가지에 붉은 꽃잎 하나 둘 피기 시작해서 사랑하는 것들 다 삼킬 듯 한여름 절정으로 피어서 ‘사랑’이라는 붉은 플래카드가 내걸리고 슬픔으로 꾹꾹 눌러쓰는 편지처럼 하나 둘 꽃잎 져서 바닥에 떨어지면 또 하나 둘 꽃잎 피어서 꽃송이를 이룬 채 백일을 사랑이라고 꼭꼭 보듬어 안았다가 가슴 새까맣게 타서 그리움도 모두 지워지고 없어질 때면 너는 어디에 가 있을까? 하늘이 높아 꽃잎 진 길은 붉어지고 눈물진 길에서 보게 되는 너는 흔적도 없이 붉은 가슴에서 눈물로 씻겨가 그 여름 사랑이라는 붉은 플래카드가 내려진다. ■ 권옥희 1955년 경북 안동 출생. 1992년 『시대문학』으로 등단했으며 강서문학대상을 수상했다. 시집 『마흔에 멎은 강』, 『그리움의 저 편에서』가 있다.
군무는 시작되고 /양창삼 우리는 겨울의 한 중간에서 만났다. 애써 안부를 묻지 않아도 눈빛만으로도 서로를 알았지. 자꾸만 익숙한 것과 이별하라고들 하지만 그게 어찌 쉬운 것이겠는가. 이번 겨울은 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게 마음 들어 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를 감싸는 마음을 읽으면 그저 감사할 뿐이다. 저 끝에선 봄이 무대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화사한 무늬에 겨울이 그만 기가 죽지만 찬바람 하나로 얼마든지 날릴 수 있기에 꾹 참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숨은 화를 건드리지 말게나. 차라리 겨울이 내민 마지막 티켓 한 장 받아들고 그가 펼칠 공연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지. 내가 자리에 앉자 그의 힘 찬 발끝이 하늘에 닿았다. 군무는 시작되고 나는 그의 춤사위를 넋 잃고 바라본다. 봄도 놀라 두 눈을 부릅뜬다. ■ 양창삼 1944년 만주 쟈무스 출생. 서울대에서 정치학 및 경영학을 공부했으며, 한양대학교 경상대학 경영학부 명예 교수로 중국 연변과기대 부총장 및 챈슬러를 역임했다. 1966년 첫 시집 「부르고 싶은 이름들」에 이어 열한 번째 시집을 출간했다.
함께하다 /목필균 약속 없이 태어나서 산다는 것이 첫 울음이 첫 숨소리인 것처럼 살기 위해 먹는 것처럼 숙명으로 끌어안은 생명인 것을 가족이 되고 친구가 되고 귀인도 만나고 담금질하는 사람도 만나고 평생 할 일을 설계하여 이룰 때까지 사랑과 이별로 희비의 근육을 키우며 안간힘으로 버틴 청춘도 기울어 피할 수 없이 늙어가는 육신인 것을 마음은 홀로 갈 수 있지만 육신은 홀로 가기 버거운 것을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잡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일인지 사라져 보면 안다 만날 수 없으면 안다 두 다리 성하여, 두 눈이 성하여 단단해진 마음으로 함께 갈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낙엽 지듯 떨어져 나가보면 간절히 간절히 간절히 가슴에 젖어든다는 것을 ■ 목필균 1954년생, 용인 출생. 『문학21』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시집 『거울보기』, 『꽃의 결별』, 『내가 꽃이라 하네』, 『엄마와 어머니 사이』, 수필집 『짧은 노래에 실린 행복』을 출간했다.
봄이 맨발로 호수를 건너다 /동시영 오늘을 데리고 호수에 간다 햇살 타고 날아오는 천상의 소식 풀 위에 나무 위에 무지개처럼 뜨는 꽃들 봄이 맨발로 호수를 건넌다 바람이 몰고 온 미소에 호수가 활짝 웃고 있다 ■ 동시영 1952년 충북괴산 출생. 동국대학교 국어국문과 졸업,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독일레겐스부르크 대학교 인문학부 수학, 한국관광대학교, 중국 길림재경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계간 『다층』으로 등단했으며 한국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시와 시학』 젊은 시인상, 동국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 『신이 걸어주는 전화』 외 여섯 권, 저서 『현대 시의 기호학』 외 다섯 권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