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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외적 침입시 산성전투를 견지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고구려는 국경선 부근에 여러 겹의 방어용 성을 쌓았고 수도로 접근하는 통로에도 차단용 성을 건설했다.
또한 이런 전략 요충지가 함락됐을 경우 수도를 보호하기 위해 수도를 평지성(平地城·평화시)과 산성(山城·전쟁시)으로 이원화하는 도성체제(都城體制)를 확립했다. 수도를 향하는 길목에 여러 방어성을 조성하는 수비책은 고구려 초기 홀승골성(오녀산성)과 하고성자성, 환도산성과 국내성, 평양 천도 후의 대성산성과 안학궁 등에 잘나타나 있다.
이는 평화시에는 평지성에서 거주하다가 외적이 침입하면 산성으로 올라가 전쟁을 하기 위한 것이다. 고구려의 대표적인 산성으로는 사방이 험준한 바위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 가운데 소도시가 들어설 정도의 분지를 갖추고 있는 오골성과 환도산성, 홀승골성 등을 들 수 있다.
◇오골성
중국 요녕성 봉황시에 있는 고구려 산성으로 중국은 봉성 또는 봉황산산성으로 부른다. ‘봉황산산성’이란 표지판이 붙어 있는 남문 입구에 들어서자 높다란 산봉우리들로 둘러싸인 별천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방이 바위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안에는 소도시가 들어서기에 충분한 대지가 넓게 펼쳐져 있어 ‘천혜의 요새’란 생각이 절로 든다.
개울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깊숙이 들어가니 옛날에 성이 있다고 해서 불리우게 된 고성리(古城里)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 곳곳에 세워진 고구려 시대 때 곡식저장고인 부경이 눈에 띄었다.
봉황산의 최고봉인 찬운봉(836.4m)에 올라서면 드넓은 대지를 포근히 감싸고 있는 오골성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이 찬운봉을 정점으로 오골성 서벽이 뻗어가고, 맞은편 동대정자(東大頂子·약 800m) 남북으로 동벽이 이어진다. 동대정자가 있는 산은 고구려성이 있는 산이라고 해서 고려성자산(高麗城子山)이라 부른다.
우뚝 솟은 산봉우리와 가파른 바위 절벽들이 이어지는 험준한 지형이 자연 성을 이루고 있고, 산봉우리 사이의 낮은 지대에는 성을 쌓아 철통같은 방어벽을 형성했다.
오골성의 규모는 둘레만 16㎞에 달해 수 백개의 고구려 산성 가운데 가장 크다. 오골성은 86구간의 돌로 쌓은 성벽과 87구간의 천연장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돌로 쌓은 성벽의 총 길이는 7천525m이며, 천연 절벽은 높이 50m가 넘는 대형만 34구간이나 된다.
645년 당나라 이세적(李世勣) 군대가 백암성을 공격하자 오골성에서 군사를 보내 도왔고, 648년 당나라 설만철(薛萬徹)이 박작성을 쳐들어가 포위하자 고구려는 장군 고문(高文)으로 하여금 오골성과 안시성 인근 성의 군사 3만여명을 이끌고 도왔다.
이처럼 오골성이 당시 주위의 크고 작은 성들을 지원한 것을 보면 고구려가 이곳을 압록강 이북의 땅을 경략하는 센터로 삼아 군사를 양성하고 전력을 축적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골성은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였을 때도 중요한 공격 대상으로 등장한다. 당 태종이 안시성을 수없이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자 당 태종에게 항복한 고연수·고혜란이 “오골성 욕살은 늙어서 성을 굳게 지키지 못할 것이니 그 성의 군수물자와 양곡을 빼앗아 평양으로 전진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건안성과 신성에 있는 10만 병력과 안시성의 병력이 퇴로를 막고 뒤를 칠까 두려워 오골성을 치지 못하고 결국 안시성에서 패하고 돌아간다. 여기서 오골성은 압록강 이북에서는 평양으로 가는 좋은 길목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오골성은 연개소문과 관련된 흥미진진한 전설이 전해진다. 서기 645년 고구려를 침범한 당 태종 이세민이 백암성과 요동성을 함락시킨 뒤 기세를 몰아 오골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 성에서 연개소문에게 역습을 받아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망갔다는 전설이다.
장대 위에는 그 옛날 연개소문이 앉았었다는 엉덩이 자국, 말 발자국, 소변이 흘러간 자국 등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은 이 성을 ‘봉황성’ 또는 ‘봉황산산성’이라고 불러 고구려인이 만든 것임을 전혀 알 수 없다. 오히려 현지 중국인들은 ‘이 성에서 연개소문이 설인귀에게 크게 패했다’는 뒤바뀐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마을 앞 논과 밭에서는 고구려인들이 사용하던 기와 파편과 질그릇 조각들이 널려 있다.
◇환도산성(丸都山城)
집안시 국내성에서 북쪽으로 2.5km 떨어진 높은 산에 자리잡고 있는 고구려 성이다. 고구려 초기 위나암성(尉那巖城)으로 불리다 198년 환도산성으로 바뀌었다. 중국은 환도산성을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이라 부른다.
국내성이 평지성으로 수도 역할을 한 곳이라면, 환도산성은 전쟁 시 왕과 백성이 옮겨와 적과 맞서 싸우던 곳이다. 사방이 산 봉우리로 둘러싸인 데다 남쪽으로는 압록강의 지류인 통구하(通溝河)가 흘러 일종의 해자(垓字) 역할을 하는 천혜의 요새를 이루고 있다.
유리왕 21년(342)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수도를 이전한 뒤 쌓은 환도산성은 해발 676m되는 최고봉을 중심으로 몇 개의 봉우리를 연결해 산 능선에 쌓은 전형적인 고구려 석성으로 둘레가 6천591m나 되는 포곡식 산성이다.
산성의 동·서·북 3면은 높은 절벽에 막혀있고 남쪽만이 탁 트여있다. 성문은 모두 5개인데 동문과 북문이 각각 2개씩이고 입구인 남문이 있다. 북쪽과 동쪽에 설치된 문은 모두 절벽과 연결돼 오르기 힘들기 때문에 남문만 관광객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적이 공격할 수 있는 성문은 땅의 높이가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한 남문 뿐이다.
그러나 남문은 뒤로 움푹 파지게 성벽을 쌓고 그 사이에 성문을 설치했기 때문에 적이 침입하게 되면 마치 독안에 갇힌 것처럼 성문 앞에 모여 있게 돼 몰살당하기 일쑤였다. 또 남문 앞에는 물까지 흘러 성의 방어력을 높여 주는 '해자' 기능을 하고 있다.
남쪽 성곽은 뱀처럼 길게 능선을 따라 돌로 쌓았으나 지금은 성곽의 원형만 남아 있을 뿐 뚜렷하지 않다.
남문을 지나 산길을 조금 더 올라가면 지휘소인 점장대(료망대)가 나온다. 약간 높은 구릉 위에 다시 돌을 쌓아 올려 만든 점장대에 오르면 적군의 움직임을 한 눈에 살필 수 있다. 점장대 뒤쪽으로는 병사의 숙소 터로 보이는 주춧돌이 발견됐다.
점장대를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말에게 물을 먹였다는 음마지(飮馬池)가 있었으나 중국이 산성을 복원하면서 물웅덩이를 메웠기 때문에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산성 안에는 이곳 말고도 솟아나는 샘물을 비롯해 여러 개의 저수지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점장대에서 동북쪽에 위치한 계단식 밭에는 남북 길이 95m, 동서 폭이 75m, 3층의 대지를 이룬 왕궁터가 남아 있다.
환도산성은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해 있어 그만큼 수난을 많이 겪은 곳이다.
11대 동천왕 20년에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의 침입을 받아 고구려 개국 이래 처음으로 성이 함락된 적이 있고, 이듬해인 21년에는 현도군 태수 왕기의 침입으로 왕이 옥저로 피신하기도 했다.
그 후 16대 고국원왕 12년에 다시 환도성으로 이전했으나 그 해 연나라 모용 황이 쳐들어와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왕실의 보물을 탈취한 뒤 궁전을 불태우고 환도성을 헐어버리는가 하면, 미천왕(동천왕의 부친)의 시신과 왕의 모친을 비롯한 남녀 5만명을 납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성은 장수왕 대에 평양으로 천도한 뒤에도 계속 전략적 요충지로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