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103주년이 되는 날이다. 가을보다는 겨울에 가까운 느낌이 드는 요즘인데, 국가를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기꺼이 바친 만 30세의 뜨거운 피를 가진 청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구를 겨눴을 때도 이런 차가운 바람이 불었을까. 100여 년 전 그 날의 안중근 의사를 다시금 기억해보고자 한다.
안중근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가슴과 배에 검은 점이 7개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는 응칠이라는 아명으로 불렸다. 아버지 안태훈이 세상을 떠난 후에 안중근은 교육운동을 시작하고, 1907년에는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한다.
하지만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 당하자, 안중근은 더 이상 온건 노선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의병에 합류했다. 1909년 초, 뜻이 같은 동지 11인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는데, 안중근은 이때 왼손 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어 결의를 다진다. 유명한 ‘대한국인(大韓國人)’과 손바닥 인장이 찍힌 모습은 바로 이때 찍은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사찰을 명목으로 러시아의 대장 대신 코코프체프와 회견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기차 편으로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일본인으로 가장해 하얼빈 역에 잠입했고, 바로 그 곳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 거사 후 총을 던지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는 곧바로 러시아 제국 공안들에게 체포돼 일본 정부에 넘겨져 뤼순 감옥에 갇혀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 해 3월 26일 처형됐다. 불과 6개월만의 일이다.
당시 체포당한 안중근은 재판 과정에서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신분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다”고 하면서 국제법에 따른 대우를 요구하며 이토를 죽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고 한다.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는 이러하다. 한국의 민 황후를 시해한 죄요,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요,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철도·강산·산림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군대를 해산시킨 죄요, 교육을 방해한 죄요, 한국인이 일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요,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이다.” 이렇게 하나하나 그들의 죄를 나열하고 당당하게 국제법에 따른 대우를 요구했던 안중근, 그에게서 강한 신념과 뜨거운 애국심, 그리고 곧은 기개가 느껴진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일제의 침략성을 알리고 저항의 의지를 알린 중요한 사건임에 틀림없으며, 그 때문에 안중근 의사는 이념을 떠나 남북한 모두에게 존경받고 있다. 휴전선으로 나뉜 한반도에서 남북한 모두가 존경하는 인물이 흔치 않다는 점에서 안중근 의사는 우리 민족의 위대한 영웅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10월도 얼마 남지 않은 요즘, 안중근을 기억하고 기리며 남산에 위치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방문해 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