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한국역사의 상흔, 남북 이산가족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014년 새해벽두부터 통일대박을 언급하며 7만여 이산가족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이들에게 전쟁의 포화 속에 눈물로 돌아선 가족은 평생 지울수 없는 상처이기에 누구보다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산가족 상봉, 남북 정상회담, 통일시대 개막 등에 거는 기대와 염원은 결코 저버릴 수 없는 숙명과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해 2월 가뭄 속 단비처럼 찾아온 제19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도 이들의 상처를 치유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언제가 될 지 모를 날을 기약한 채 눈물과 그리움만 서로의 가슴에 묻고 또 다시 뒤돌아서야 했다.
이와 함께 한국전쟁 이후 수십년간 가족과 헤어져 지낸 통곡과 회한의 세월도 한국역사의 상흔으로 남게됐다.
■분단 40년만에 이산가족 만남 개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1971년 8월 12일에 대한적십자사의 이산가족찾기 운동에서 비롯됐다.
한국전쟁으로 남과 북에서 헤어져 살고 있는 이산가족들의 실태를 확인해 소식을 전하고 상봉하는 게 목적이었다.
남북 이산가족들의 첫 만남은 분단된 지 40년만인 1985년 9월 남북한 적십자간 합의에 의해 이뤄졌다.
당시 ‘고향 방문단’이라는 이름으로, 남북에서 각각 30 가족이 서울과 평양을 방문하면서 이산가족 상봉의 역사가 시작됐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본격화된 것은 2000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간의 정상회담 이후부터다.
당시 두 정상이 합의해 발표한 6.15공동선언을 계기로 매회 각각 100명씩 서로의 가족을 찾는 이산가족 상봉을 추진한다.
이후 2010년 10월까지 모두 18차례 대면상봉을 통해 모두 3천800여 가족, 1만8천여 명이 재회의 기쁨을 누렸다.
2005년에는 처음으로 화상상봉도 이뤄져 2007년까지 모두 7차례에 걸쳐 3천700여 명이 서로의 소식을 주고 받았다.
하지만 매년 두 차례 정도 이뤄지던 상봉 행사는 이명박 정부 들어 남북관계가 악화되면서 4년간 단 두 차례에 그쳤다.
박근혜 정부 출범 첫 해인 2013년에도 추석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열기로 합의했지만 북한이 행사 나흘 전 연기를 통보하면서 무산됐다.
이후 정부는 북측에 지속적으로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를 요구했지만 북한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를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우리 측과 달리, 북한은 체제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지난해 2월 북한이 전향적 자세를 보이면서 3년 4개월만에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재개됐다.
■경기도, 국내 최다 이산가족 거주
지난해 통일부 자료에 따르면 1988년부터 2014년 11월 말까지 한국 측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는 모두 12만9천604명이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47%(6만733명)는 생전에 북측 가족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삶을 마감하고, 이제 6만733명만 남았다.
이중 전국에서 가장 많은 1만9천910명(28.9%)이 경기도에 살고 있으며, 서울은 1만9천839명(28.8%)으로 조사됐다.
다음으로 인천 5천715명(8.3%), 강원 4천47명(5.9%), 부산 3천348명(4.9%), 대구 1천641명(2.4%) 등의 순이다.
특히 이산가족들의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이들 신청자중 70세 이상의 비율은 이미 80%를 넘어섰다.
매년 3천여명에 이르는 신청자의 사망율과 평균수명(81세)을 고려하면 이들은 20년 후면 모두 사망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2013년 한해에만 3천841명이 사망했으며, 2014년(11월 말 기준)에는 2천949명이 세상을 떠났다.
도내에서도 2013년 863명, 2014년 748명이 각각 가족상봉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70세 이상의 경우 이산가족 상봉규모를 앞으로 10년간 해마다 7천명 이상으로 늘려야 북측 가족과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현재 남북이산가족 상봉 행사는 정기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규모도 급격히 줄어드는 추세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이후 8년간 매년 1천 명 넘게 많을 땐 3천600명 이상의 이산가족들이 상봉했다.
그러다 2009년과 2010년엔 각각 800여 명으로 줄더니, 2011년 이후 3년간은 가족상봉이 한차례도 성사되지 않았다.
3년만에 재개된 지난해 2월 이산가족 상봉 때에도 남북 양측에서 각각 100명씩 보낸 것이 고작이었다.
이때문에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 생사 확인, 서신교환 등에 대한 논의보다 상봉규모 확대가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이용화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매년 상봉 규모를 7천 명 이상으로 늘려야 생전에 모두 한 번쯤 만날 기회가 돌아간다. 70세 이상 고령자의 경우 10년간 매년 6천명 이상 상봉을 해야 생애 한 번이라도 북측 가족과 만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신년특집-통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② 실향민의 2015 통일염원
실향민, 한국전쟁으로 북녘 고향을 떠난 후 더 이상 자유롭게 돌아갈 길이 막힌 사람들.
이들은 가족을 두고 자유의 나라를 선택했다는 죄책감 아닌 죄책감에 눈시울을 적시기가 일쑤다.
이때문에 북녘에 남겨둔 가족은 지울 수도 치유될 수도 없는 기억과 상처로 고스란히 남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헤어진 가족과의 만남을 마냥 포기할 수도 없어 해가 바뀔 때마다 상봉의 새로운 기대와 희망을 꿈꾼다.
꿈 속에서의 만남조차 가슴 벅찰 만큼 북녘 가족에 대한 이들의 그리움은 간절하고도 애틋하다.
■“북녘 가족과 만날 날만 학수고대”
구리시 수택동에 사는 김철민(95) 옹은 1951년 32세의 나이에 인민군으로 강제동원돼 한국전쟁에 참가했다.
참전 당시에는 남겨진 부인과 2남 2녀의 자녀를 두번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나 서구 열강들의 군사·외교적 긴장과 이권다툼 속에 남북분단이 현실화되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전쟁포로가 되면서 획일적인 사회주의체제에의 순응과 자유국가로의 귀환을 놓고 선택을 요구받게 된 것이다.
그는 거제도 수용소 수감 후 1953년 반공포로 석방 당시 북에 있는 가족을 남겨둔 채 결국 자유를 택했다.
김 할아버지는 “북한에 있는 아이들을 잊지못해 동래 김씨 족보에 등재하고 지금껏 만날 날만 손꼽아 그리며 살아왔다”면서도 “4남매를 키워준 북측 부인에게는 너무 죄스럽고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하지만 우선 내 몸이 건강해야 북녘 가족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하루 하루 힘들지만 희망을 갖고 견뎌오고 있다”고 했다.
황해도가 고향인 이용찬(65) 씨는 북녘에 두고 온 형제자매의 생사라도 확인할 수 있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었다.
이씨는 “북한 어디엔가 계시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생사도 몰라 가슴에 맺힌 한을 안고 살아간다”며 “형제들 모두가 어떤 고생이 있더라도 통일이 될때까지 제발 살아 있기만을 기도한다”고 말했다.
생전에 부모가 살던 고향을 그리며 통일을 꿈꾸는 한인2세도 있다.
실향민 2세 최규남(51) 씨는 “통일이 되면 북녘고향을 찾아 부모님께서 들려주신 고향의 향수를 느끼고, 그곳에서 당신들이 일구신 자산도 함께 찾고 싶다”고 말했다.
■매년 새해벽두 북녘가족 안녕기원
실향민들은 매년 설날, 추석 등 명절 때마다 임진각에서 합동차례를 지내며 잠시나마 망향의 한을 달랜다.
이들은 임진각 망배단에서 망향경모제를 통해 북녘 가족들의 안녕과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기원한다.
고향 땅이 지척인데도 수십년째 생사조차 모르고 지내온 통한의 세월을 스스로 달래며 눈시울을 적시는 일이 다반사다.
현재 정치권 등에서 옥신각신하는 통일 또는 외교 명분은 이들 실향민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지 이미 오래다.
북한땅에 개성공단이 들어서고 철도와 다리가 놓이는 일보다 헤어진 부모, 형제자매와의 재회가 더 절실하다.
생전에 북녘 가족의 얼굴을 한번만이라도 보는 것이 눈물과 그리움으로 지샌 수십년의 세월에 대한 보상일 것이다.
지난해 2월 제19차 남북이산가족 상봉에서도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반가움으로 연신 눈물만 쏟아내기 일쑤였다.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사건 이후 3년 3개월만에 재개된 만큼 더욱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평안도가 고향인 이선향(88) 할머니는 북측의 남동생 윤근(71) 씨를 만나 미안한 마음을 전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이 할머니는 1·4후퇴 때 가족들과 고향을 등지고 피난길에 올랐지만 도중에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 남쪽으로 내려왔다.
황해도 연백이 고향인 이범주(86) 할아버지도 남동생 윤주(67)씨와 여동생 화자(72) 씨를 만나 “미안하다”는 말을 되뇌었다.
이 할아버지는 당시 “1·4후퇴 때 할아버지께서 내가 장남이니까 먼저 연백에서 가까운 강화도로 가라고 했다”며 “이후 가족을 남겨두고 왔다는 마음에 지금까지도 가슴이 먹먹하다”고 말했다.
그는 부모님의 묘소와 기일 등을 물으며 그동안 부모님 곁을 지킨 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이들이 두 손에 선물 보따리를 가득 안고 설레는 마음으로 자유롭게 고향땅을 찾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대해본다.
글=윤현민기자 hmy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