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언론계 대선배, 이창식 선생... '마당발 정치인 이병희' 출간

2020.12.07 16:31:19 10면

1953년 기자 생활 시작... 경기신문 주필, 경인일보 편집국장 등 역임
1976년 '월간문학' 통해 등단... 10개 월에 걸쳐 500 페이지 이상 분량 소화
정치적 철학 표현, "강이 없는 마을에 다리를 놔주겠다. 이런 헛소리 안해"

"내가 몇 살인지 알아요? 1930년 생이에요.(웃음) 그런 선배가 수원에 한 명 있다. 일선에서 은퇴한 지는 오래됐지만 현역이거든요. 이 나이까지 글쓰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생각해줘요. 젊은 동업자들 만나니까 기분이 너무 좋아요."

 

 

'마당발 정치인 이병희'란 책으로 지난 4일 출판 기념회를 가진 이창식 선생은 지역 언론계 대선배다. 그래서 장난끼 어린 말투로 "예, 선배님" 했더니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다. '기자는 역시 기자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현장에서도 직접 찾아와준 어린(?) 후배에 대한 각별한 고마움이 느껴질 만큼 따뜻하고 환한 미소로 반갑게 맞이해 줬다. 

 

이 선생은 1953년 기자 생활을 시작해 경인일보 편집국장과 경기신문 주필, 한국신문편집인협회 심사위원을 역임했으며, 1976년 '월간문학'을 통해 등단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러니 글을 잘 쓰는 건 어쩜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90이 넘은 나이에? 5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존경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이 많은 분량의 원고를 10개 월 만에 다 써 냈다는 사실도 놀랍기만 했다. 

 

그것도 만년필로 일일히 써서 말이다. 지구상에서 컴퓨터를 못하는 바보같은 사람 하나를 자처한 이가 바로 자신이라고 말하는 이 선생이다.


"이번이 마흔 번째 책입니다. 경기도사라고 하는 책을 제일 먼저 만들었고, 수원에서 '사'자가 붙은 책은 거의 다 내가 썼을 겁니다." 

 

 

당초 이 책은 올해 초 출간 예정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 상황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연기에 연기를 거듭하다가 이제야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이날 출판 기념회는 수원시와의 협의 후 철저한 방역 지침 준수 아래 무사히 거행됐다. 다만 100명 이상은 입장이 안 돼 그대로 발길을 돌린 이들이 많아 아쉬움을 남겼다.

 

 

"정치인 이병희는 평가를 여러 가지로 받아 마땅한 사람이죠. 반민주화, 독재, 이런 수식어가 붙으면서 비판 받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과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보다는 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1960년대, 그러니까 故 이병희 의원이 6대 국회의원에 출마하던 1963년 수원의 인구는 6만여 명 밖에 안 됐다고 한다.

 

"경기도라고 하는 것이 수부가 인천이었고 수원은 변두리, 솔직한 말로 한천이었어요. 정말 너무 초라한 시골이었거든요. 그 때만 하더라도 북문까지 가는 큰 도로에 아스팔트가 깔리지 않았어요. 비가 오면 질척질척하고, 자동차가 지나가면 다 뒤집어쓰고."(웃음)

 

 

그런데 故 이병희 의원이 수원에서 7선을 지내면서 엄청난 일을 해낸 것이라고 이 선생은 평가했다.

 

우선 광복 이래 17년 동안 이전지 논쟁을 벌였던 경기도청사를 수원으로 옮겨옴으로써 수원시의 품격을 격상시켰고, 삼성전자와 성균관대학교 자연과학캠퍼스를 유치해 전자산업의 도시, 고등교육의 요람으로 발전시켰다. 

 

1971년엔 물 부족으로 고통받던 수원에 백리 밖의 한강물을 끌어오는데 성공하면서 식수와 공업용수 난을 해결했고, 같은 해 4월엔 수원연초제조창을 유치해 산업도시로서의 기틀을 마련했다.

 

 

특히 수원의 대표적인 상징인,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화성의 성곽 복원사업은 오늘날 수원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장 큰 선물이 됐다.


"6.25때 어떤 상태였냐 하면요. 피난민들이 집을 지을 때도 없고, 돈도 없으니까 무허가로 집을 지어요. 그런데 성벽이 있으면 그게 판잣집을 짓는데 아주 좋은 조건인 거예요. 등이 되거든, 등받이가. 그러니까 성곽 주위에 판잣집이 엄청 생겼어요."

 

 

성곽의 돌을 빼다가 주춧돌로 사용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고 이 선생은 기억했다. 그리고 "그걸 복원한 사람이 이병희"라고 말했다. 현재 돈으로 환산을 해보면 당시 220억 원의 예산을 끌어다가 만든 것이 지금의 화성이라는 게 이 선생의 부연이다.

 

故 이병희 의원과의 만남이 시작된 건 1963년 총 선거가 시작되고 국회가 구성, 출입기자를 하면서부터라고 했다.

 

"나는 전국의 국회의원을 상대하는게 아니고 도내 국회의원 13명, 이 사람들을 주로 취재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하루도 빠짐 없이 13군데를 돌아다녔어요. 그때 보니까 이병희는 일하는 스타일이 아주 다르더라고요. 다른 사람들은 그냥 건성건성 그러는데, 이 분은 굉장히 적극적이고. 그러다보니까 공화당내에서도 상당히 인정을 받아 7대 때 원내 부총무로 올라가더라고요."

 

 

특히 한 번 약속한 것은 하늘이 두 쪽 나도 꼭 지키는 사람이었다고 이 선생은 말했다. 안 되는 일은 안 되는 거고, 되는 건 어떻게 해서든 만들어 내는 것이 제일 훌륭하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강이 없는 마을에 가서 다리를 놔주겠다. 이런 헛소리 안했다"는 말이 그의 정치적 철학을 표현하는 말이지 않을까 한다고 덧붙였다.

 

이 책의 제목은 원래 '2실 1락 7기' 라 쓰려고 했단다. "2번은 기회를 놓쳤고, 전두환 군부 때. 1번은 이호정이한테 떨어진 거, 자만해서. 그래도 7번은 당선이 됐으니까 7기라고 표현한 거예요."

 

국회의원을 7번 하면서 2번 기회를 놓치고 1번 떨어지는 등 참 흔치 않은 경력이라서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 번의 논의 끝에 타이틀이 '마당발 정치인 이병희'로 바뀌었다.  

 

 

이 선생은 평전을 쓸땐 아무래도 주인공에 대해서 미화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 책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를 스스로 경계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마음에는 그렇게 정하고 글을 쓰는데, 붓끝이 자꾸 벗어나려고 하는 걸 용케 극복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끝으로 한 마디만 더하자면, 국회의원들 많이 뽑아봤지만 입만 열면, 더구나 선거 때가 되면 되지도 않을 공약들 많이 하는데 이병희는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

   

[ 경기신문 = 강경묵 기자 ]

강경묵 기자 kamsa59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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