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무꾼의 하루
▶ 땔감 구비의 경우
여러 명의 나무꾼이 필요했기에 3~5가구가 품앗이를 하는데, 대략 10명 안팎의 나무꾼으로 구성된다. 땔감 마련은 동시에 작업이 진행되며 나무를 하기 위해 약 일주일의 기간을 정했다. 정해진 날 새벽에 모여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해뜨기 전 아침 6시쯤 지게를 지고 집을 나섰다.
땔감은 소나무를 비롯해 서어나무(일명 소사나무), 도토리나무, 솔 가래기, 나무뿌리(밑둥) 등 다양하며, 나뭇가지는 대체로 손가락 굵기 정도를 벴다. 한 아름 정도의 양을 모으면 준비한 칡 줄기로 단단히 묶어 단을 만들었는데, 하루에 성인이 벨 수 있는 양은 35~40단 정도였다.
귀가는 일몰 전에 이뤄졌으며 하루 일을 마치면 정성껏 마련한 밥상을 차려놓고 힘든 시간을 보상받았다. 음식 장만의 경제적 부담은 돌아가며 품앗이로 하는 일이기에 그다지 크지 않았다.
▶ 땔감을 운반할 경우
운반의 경우도 벨 때와 같이 품앗이에 따라 움직이는데 적어도 7~8명, 많으면 10명 정도 같이 움직인다. 운반하는 방법은 지게에만 의존하는 경우, 지게로 중간 지점까지 모아놨다가 달구지에 싣고 오는 경우가 있다.
![삼각산 서쪽(모래울동 방면).](https://www.kgnews.co.kr/data/photos/20220206/art_16441930271948_37b29b.jpg)
농토가 거의 없는 모래울동 혹은 고주동에서는 주로 지게에 의존했지만 농토가 있는 내동이나 양지동은 달구지를 이용했다. 먼 산에서 오는 경우는 중간 지점에 모아놨다가 운반했다. 지게를 이용할 경우 어른은 5~6단, 어린이는 보통 3~4단 정도씩 운반했다.
산 중턱에서 땔감을 지고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는 횟수는 5~6회 정도이며, 하루 일을 마치면 종아리는 알이 배길 정도로 딴딴하게 변했다. 그래서 땔감을 하는 집에서는 나무꾼의 힘든 노고에 정성껏 식사 접대를 했다.
◈ 빈부의 차에 의한 땔감의 질과 양
주민 가운데는 산을 보유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면적이 넓거나 적은 면적을 소유한 사람 등 다양한데 자기 소유의 산이 있어 땔감을 하는 사람은 보통 3~4년 가량의 주기로 베기 때문에 산을 3~4등분 구역을 나눠 돌아가면서 땔감지를 선택했다.
따라서 재산의 정도에 따라 땔감의 질과 양도 달랐다. 그러나 대부분 집은 매년 반복되는 일이기에 어느 정도의 양은 갖췄으며, 상부상조의 미덕이 잘 갖춰진 지역인지라 땔감에 대해 인색하진 않았다.
◈ 숯(木炭)으로 유명한 대청도
산이 넓어 수목에서 나오는 유명한 임산물(林産物)은 무엇이 있을까? 명약으로 썼던 상기생(桑寄生)과 숯이 대표적이다.
조선 후기 정조가 왕실에서 약 달이는데 필요한 숯을 대청도에서 제조 상납하라는 특명을 내렸다는 전언과 러·일 전쟁 당시 일본인들이 대청도 나무로 숯을 만들어 갔다는 얘기도 있다. 지름 1.5~2m 정도의 원형 구덩이를 파고 흙이 무너지지 않게 가장자리에 돌벽을 쌓고 숯을 만든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11월 초순 입동 지나 긴 겨울을 걱정 없이 보낼 수 있게 땔감을 마련한 집주인의 마음은 어떨까? 매년 제사처럼 돌아오는 땔감 준비지만 뿌듯한 의식의 흐름은 상부상조하는 그들만의 마음속에 존재할 것이며 막걸리와 사랑방 아궁이에서 구어 낸 백고구마, 분지 향이 나는 호박김치나 얼음 동동 띄운 동치미를 안주 삼았던 주안상은 그들만의 소확행이 아니었을까?
끝으로 도움을 주신 지○철님(모래울동), 김○찬님(서내동)께 감사드린다. /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