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의 달리는 열차 위에서] 침묵의 연대

2022.05.11 06:00:00 13면

 

1991년말 쯤이었을게다. 나는 대구에서 울산으로 가는 마지막 고속버스 맨 뒤편 좌석에 잠들어 있었다. 누군가 흔들어 깨우는 통에 눈을 떴다. 눈앞에 정복경찰 두 명, “신분증 좀 봅시다” 내미는 주민증을 보더니 “주민번호가 어떻게 되요?”하고 물었다. 아뿔싸.. 당시 나는 5공화국의 3년차 수배자였다. 주민증은 우리 친형님의 것이었는데 늘 외우던 주민번호가 갑자기 가물가물했다. 자다 깨서 생각이 나지 않는다했더니 차에서 내리란다. 경찰이 앞장서고 내가 통로를 뒤따라가는데 누가 부른다. “아저씨, 가방요~” 내 발밑에 두었던 가방을 가져가라는 소리다. 아.. 어떻하나.. 고백컨대, 가방에는 족히 수십명은 조직사건으로 엮고도 남을 만치의 비합법 노동운동조직의 문건들이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잡히는건 문제도 아닌.. 가방만은, 가방만은 숨겨야 했다. 내가 모른채 그냥 걸어가자 주변 사람들도 더 큰 소리로 이어받았다.

 

“가방 가져가래요~”

 

등에서 식은 땀이 흘렀다. 몇걸음 앞장선 경찰은 무전 하느라 아직 못들은 눈치, 저 소리를 잠재워야 한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오른손을 등 뒤로 돌렸다. 그리곤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제발 닥치라고~ 이러다간 다 죽어”라는 몸짓이었다. 순간 버스 안에 정적이 흘렀다. 이후 내가 내리고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아무도 입을 떼지 않았다. 울산 무거동검문소에 들어서면서 “휴~ 살았다”싶었다. 지금도 그 날을 기억하면 오싹한 느낌이 살아난다. 그러면서 그때 그 버스에 같이 탔던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나의 손짓에 입을 다물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오른다. 처음 가방 가져가라고 말했던 사람이나 다른 사람들까지 손짓 하나에 심정적 연대가 이루어지고 공범이 된 셈이니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마도 당시 승객들 사이에 경찰에 대한 반감이나 뭔지 모르지만 경찰에 쫒기는 사람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있었을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최소한 중간층의 우호적 중립이 전제되어야 조금씩 바뀌더라. 어차피 강건한 진보나 보수는 소수인 법이다. 당시는 날마다 최루탄이 난무하는 거리의 시대, 경찰공화국이었다. 겨울공화국은 버스안의 침묵처럼 시민들의 심정적 연대로부터 허물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그들의 세상이 온다. 대통령실의 요직이란 요직은 모조리 검사들로 채우고 간첩조작사건의 관련자가 공직기강비서관이 되었다. 똥묻은 개가 겨뭍은 개를 나무라듯 상관을 주저앉히기 위해 가족을 도륙했던 법꾸라지들이 아직도 피가 흥건한 자리에 앉는다. 집무실이전이란 전대미문의 소동과 장관후보자들의 기괴한 과거들을 시전하면서도 “이렇게 별탈없이 정부 출범한 적 있었나”며 자화자찬하는걸 보면 30년 전의 오싹함이 되살아날 지경이다. 그때는 경찰공화국이었고 지금은 검찰왕국이 도래했다. 그때는 침묵함으로서 우호적 중립을 취했다면 이제는 보수언론에 맞서 시민들이 말함으로서 연대해야 한다.

 

“말하라, 네 입술은 자유롭지 않은가, 말하라, 네 혀는 여전히 너의 것이 아닌가”라고 했던 시인 파이즈의 말처럼 말이다. 이제 시작이다.

 

아, 검문소에서 어떻게 되었냐고? 웃기는 이야기지만, 경찰이 형님 이름으로 적힌 한자를 읽을 수 없어 수배자 검색을 못하게되자 나한테 주민증을 건네면서 “이 한자가 무슨 글잡니까?”라고 물었다. 내가 미쳤나고. 한자를 보게, 잽싸게 주민번호를 스캔~ 조금후 “이제는 주민번호가 생각나세요?” 하길래 “아, 이제 잠이 깨서 생각나네요”하고 통과, 택시타고 시외버스터미널에 가니 버스기사님이 내 가방을 들고 터덜터덜 가고 있더라고~ 30년 전 이야기다. 

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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