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헌의 심우도] 추파, ‘은근한 눈길’된 가을의 물결

2022.09.02 06:00:00 13면

 

추석(秋夕)의 계절, 가을이다. 가을은 그 저녁(夕) 추석이 정겹고, 그 물결(波) 추파는 은근하다. 추파(秋波)가 무엇인가?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 바람에 시나브로 일렁이는 호수처럼, 가을의 물결은 조용하고 투명하다. 맑아서 서늘하다. 사람 눈빛이라면 보는 이의 가슴을 싸늘하게 얼려버릴 강렬함을 품었겠다. 사랑을 구하는 여인의 그것이라면 아름다운 첫 키스의 추억처럼 날카로운 비수(匕首)는 아닐까. (2016년 9월)

 

언어는 역사를 품는다. 그 틀(프레임)이 보듬었던 지난 사람들의 마음(생각)이 그 글자의 획(劃)과 점(點)에 빼곡히 서렸다. 세상 이치다. 서양 언어와 생각(철학)도 비슷하다.

 

가을의 물결이 ‘은근한 눈빛’이더니 마침내 ‘엉큼한 아첨’이 되었다. 원래의 뜻을 모르는 이들도 있겠다. ‘추파가 윙크지 왜 가을의 물결이야?’ 하는 질문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사전엔 ‘가을의 잔잔하고 아름다운 물결’이 秋波의 1번 풀이다. ‘이성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은근히 보내는 눈길’과 ‘환심을 사려 아첨하는 태도나 기색’이 2, 3번 풀이다.

 

초사(楚辭)의 ‘초혼(招魂)’, 초나라 문장(시)의 대표 격(格)인 굴원 등의 작품 모음 중 주목할 시다. 죽은 이의 혼(魂)을 불러 ‘너 살던 옛집에 어서 돌아오라.’고 유혹하는 절규가 담겼다. 굴원 작품이라고도 하고 제자 송옥의 시라고도 한다. 사면초가(四面楚歌)의 그 楚다.

 

기원전 3세기 무렵의 아름다운 시다. 그 혼의 살아생전 부귀영화에 춤추는 요염한 16명 여인들의 눈빛이 선명하다.

 

주군(主君)을 오늘밤 홀로 차지하고자 흘겨보는 눈길 즉 묘시(眇視, 妙視)의 목파(目波·눈의 물결)를 秋波라고들 한 데서 그 뜻이 무르익었던 듯. 맑고 서늘한 이미지가 가을(秋)의 느낌을 불렀으리. 눈이 품어내는 에너지의 파장(波長)일까.

 

‘여자의 은근한 정을 나타내는 눈치, 즉 곁눈질이 水波(수파)의 橫流(횡류)와 같다.’고 그 시 구절을 해석한 자료도 있다. 가을의 물결이 은근한 정이 된 사정이겠다.

 

‘말뜻’의 전이(轉移)나 확대는 의미 또는 정서적 인신(引伸)으로 설명된다. 언어의 활용 방식 중 하나인 인신은 ‘말(단어)의 뜻을 잡아당기고(引) 늘려 펴서(伸) 표현의 성능을 개선하는 것’이다. 긴 장(長)자가 팀장처럼 ‘조직의 윗사람’이 되는 것과도 비슷하다.

 

문자는 발음기호에 뜻을 더한 것이다. 이를 알면 세상 여러 이미지(언어)의 속뜻을 빙그레 웃으며 읽을 수 있다. 윙크인 추파가 가을의 물결인 사정도 설명 가능하다.

 

설명할 수 있어야 (사물의 이치를) 아는 것이다. 설명할 수 없다면 모르거나 어설프게 아는 것이다. 말의 본디를 돌아보면 추파만큼 (부귀영화보다 더) 재미있다.

강상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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