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망은 인간이 빠지기 쉬운 상태이다. 하지만 일정한 시대, 일정한 사회 계층 사람들 사이에 특히 그것이 널리 퍼져 있는 경우가 있다. 기독교 집단이 바로 그러하다. 고차원의 인생의 법칙을 하나도 모르는 사람들이나,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의 사회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죄를 저지른 사람이 누구든, 학문을 배운 사람이 저지른 죄가 가장 무섭다. 무지하고 타락한 민중은 방자한 학자보다 낫다. 전자는 눈이 멀어 길을 잃지만, 후자는 눈이 멀쩡하면서도 우물에 빠지기 때문이다.’(사다)
사람들은 영혼을 잃어버렸다. 그 뒤 시간이 흐르자, 이제는 다시 그것을 그리워하고 있다. 이 영혼의 상실이 바로 우리의 환부, 현대의 모든 현상에 무서운 죽음을 선고하고 있는, 전 세계에 걸친 사회적 부패의 근원이다. 우리에게는 이제 종교도 없고 신도 없다. 인간은 영혼을 잃어버리고 헛되이 치료 방법을 찾고 있다. 그리하여 잠시 병세가 수그러든 것처럼 보이는 전염병은 곧 다시 더욱 맹렬하고 더욱 무섭게 기승을 부릴 것이다. (칼라일)
모든 범죄와 온갖 종류의 무서운 기사로 가득 찬 언론은 고기를 중심으로 한 아침 식사의 반찬과도 같은 것이다. 몸도 마음도 갖가지 유해한 영향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이, 이윽고 다툼과 전쟁과 자살의 길을 걸어가기 쉽다는 것이 뭐 그리 놀라운 일이겠는가? 이런 식으로 하루를 시작한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정신적, 육체적으로 유해한 음식을 섭취하고 있는 동안, 그들은 끊임없는 불안과 고뇌의 절망 사태에 빠져든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공허함을 느끼기 때문에 사방으로 뛰어다니면서 만족을 찾는다. 그러나 그들을 끌어당기는 새로운 위안의 공허함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파스칼)
우리가 자신의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하고 있는 일은, 마치 타조가 제가 살해당하는 것을 보지 않으려고 머리를 숨기는 것과 완전히 같다. 아니, 오히려 타조보다 더 나쁘다. 불확실한 미래의 불확실한 생활을 불확실하게 지키려고, 확실한 현재의 확실한 생활을 확실히 파괴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이니까.
오늘날 부유층의 생활을 옆에서 보고 있으면, 그들이 자기 생활의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하고 있는 갖가지 일들은, 단지 기분을 속일 뿐이며, 자신들의 안전이 절대로 보장되지 않으며, 또한 보장될 리가 없다는 것을 잊기 위함이다.
현대인들은 극히 일부 사람들이 터무니없이 거대한 부를 차지하고, 심한 빈곤 상태에 있는 다수가 그들에게 선망과 증오를 느끼고 있는 세상에서, 폭력과 군비와 전쟁이 난무하는 세상의 무의미함과 잔혹함을 보지 않으려 하고 있으며, 자신들이 그런 생활을 계속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필사적으로 믿고 싶어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미망에 빠져 있다고 해서 미망을 미망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씨ᄋᆞᆯ 여러분,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참이 길이요 생명이 길입니다. 같이 살자는 것, 스스로 살았다 믿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믿으면 삽니다. 믿지 않으면 이미 죽었습니다. 참을 하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거짓을 하면 벌써 진 것입니다.
참에는 꾀가 없습니다. 믿음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고 참을 지키는 일을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직입니다. 그 어리석음이 죽음과 그 지혜를 이깁니다. (함석헌)/ 주요 출처: 톨스토이 『인생이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