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한 사과’라는 말이 한글날 즈음에 논란이 됐다. 사과는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 것’이다. 심심하면, 당연히 아니 된다. 마음 전해지도록 진해야 하고, 간간해야 한다. 따분하고 맛없으면 되겠는가.
(언어) 전문가들도 걱정한다. ‘심심한 사과’는 문해력 결핍의 상징과도 같다는 얘기들이 무성하다. 그런데 이런 걱정을 한자교육의 필요성을 (슬그머니) 내미는 계기로 삼지 말라는 ‘경고성’ 칼럼도 눈에 띄었다.
그 칼럼의 한 대목 ‘한자 없이 한글만으로도 얼마든지 의사소통이 가능하니 (사회 일각에서는) 딴 생각 말라.’는 취지의 주장이 쟁쟁하다. 이런 논의는 이집트상형문자나 갑골문 같은 어원 공부에 관심이 있는 필자에게 좀 불편하다.
결론부터 얘기하자. 한국어의 어휘와 시민의 어휘(능)력을 망가뜨리지 말자는 것이다. 한자교육은 그 다음의 주제다.
그 논설의 ‘한글만으로도 얼마든지’라는 대목을 거푸 읽는다. 이런 생각에 부응하는 연구와 성과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가지고 있다는 ‘선언’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계속된다. 이번 경우, ‘심심하다’에 ‘맥없고 맛없다.’는 뜻 말고도, ‘마음의 드러냄(표현)이 깊고 간절하다.’는 뜻도 있음을 가르쳤어야 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이 대목, 큰 모순 아닌가? ‘어른’들은 아래 세대에게 심심한 사과를 해야 한다. 그 책임은 지성의 절실한 의무다. 허나 놓쳤다.
‘외우라고 강요만 하고는 문해력을 왜 탓하느냐?’는 취지의 글도 있어 주목한다. 글자나 글월(의 원리와 해법)을 가르치지 않고 글눈 어둡다고 탓하면 되는가? 그런데 그 글에도 한자교육 의무화를 경계한다는 말이 들어있다. 한자를 겁내는 것인가? 왜?
한자 없이, 한국어의 (최소한 3천년 쌓인) 개념어와 이미지를 얼마든지 소통할 수 있는 방법론을 누가, 어떤 모양으로 가지고 있는지 묻는다. 그 필요, 절실하다. 국립국어원은 당연히 그 노하우를 만들어 두었겠지. (한)국어학자들도 의당 가지고 있겠다.
가능하리라. 허나 힘(비용)은 많이 들 것이다. ‘심심한 사과’ 논란이 없었다면 저런 불통이나 뜻 비틀린 소통의 문제가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니. 되레 다행이라고 여긴다.
영어 ‘open’ 없이 우리말 ‘오픈’을 설명하는 방법도 있겠지. 한국어 ‘화이팅!’이나 ‘파이팅!’이 ‘fighting’에서 유래했다는 설명은 적절하지 못한가? ‘심심하다.’도 비슷하다. 한자(영어) 없는 순혈, 순종의 한국어를 만들고 싶은가? 가능할까?
필요한데 찾아도 없다. 학술어나 전문용어 등 한국어의 개념어를 영어나 한자 같은 한글 이외의 (외래적) 요소 없이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기성세대는 내놓아야 한다. 없다면, 만들어내라. 그게 문해력의 전제 조건일 터다.
‘열린 한국어’를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