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죽음에 의해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모습을 바꿀 뿐이다.
하루의 고뇌는 그날 하루로 족하다. 자신의 삶을 의혹과 공포 속에서 낭비하지 말라. 현재의 의무를 잘 수행하는 것이, 앞으로의 몇 시간 또는 몇 세기를 위한 최선의 준비임을 믿고, 열심히 자신의 일에 종사하라.
지금의 우리에게는 미래는 언제나 환상처럼 여겨진다. 중요한 것은 삶의 길이가 아니라 깊이이다. 문제는 삶을 지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고귀한 영혼의 행위처럼 영혼으로 하여금 시간을 초월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삶을 살고 있을 때 시간 같은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예수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가 끼친 영향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시간을 초월하게 하여, 그들 자신을 영원한 존재로 느끼게 했다. (에머슨)
인간이 살고 있는 집은 부서지고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영혼이 자신을 위해 깨끗한 사상과 선한 행위로 지은 집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며, 그런 집에 사는 자를 해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류시 말로리)
내세를 믿을 수는 없지만, 현재의 삶이 불멸이라는 것은 믿어도 좋을 뿐만 아니라, 똑똑히 확인할 수도 있다.
불멸에 대한 신앙은 논리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방식에 의해 주어진다.
죽음에 직면하여 우리가 느끼는 공포는, 우리가 인생을 이해하는 진실성의 지표이다. 우리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적으면 적을수록 우리의 자유, 평화, 영혼의 힘에 의한 의식, 그리고 삶의 기쁨은 더욱 커진다. 죽음의 공포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현재의 삶과 진실하고 무한한 삶의 동일성을 완전히 의식했을 때, 거기에는 어떤 것에도 파괴되지 않는 평화가 있다.
인격은 생명진화의 가장 높은 맨 끝이지만, 거기까지 가기 전에 생명의 아주 낮은 원시적인 밑의 단계에서도, 자유의 원리에 따라서 저항의 원리는 살림을 지배하고 있다. 유기체라 부르지만 그 기(機)라는 것이 무엇인가? 벌써 그것이 자성적인 것 아닌가? 생명이 어째서 무생속에서 나왔는지 아무도 설명할 수 없고, 그저 생명 자체가 자기 설명을 할 뿐이다.
생명은 곧 자기주장이다. 진화론에서는 무생대, 시생대를 갈라 말해서 지구 위에 생명없는 시대가 오래 계속되다가 어느 때에 가서 비로서 생명의 탄생을 보게 됐다고 하는데, 그때가 언제인지는 물론 분명히 알 수 없으나, 하여간 그런 어떤 순간을 생각하여보라.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현상인가? 가령 단 하나의 현미경적인 단세포가 막막한 우주의 어느 구석에서 처음으로 꼼틀하는 운동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지금까지 오던 무생의 우주 전체에 대해 큰일 아닌가? 그 자연력이 압도적이었던 만큼 그 지극히 미미한 하나의 생기는 굉장한 맞섬이요 뻗댐이요 걸러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함석헌) / 주요 출처: 톨스토이 『인생이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