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은 내가 30년 철도기관사생활을 끝내고 마지막 열차를 운행하는 날이었다. 이제 연말까지 일주일 남짓한 시간이 내게 주어진 유일한 유급휴일이다. 퇴근하며 주변사람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는데 후배인 모팀장이 잔뜩 미안한 얼굴로 말을 건넨다. “형님, 저.. 내일 혹시 승무가능하십니까?” 사연인즉 며칠전 사무소에 코로나환자가 5명이나 발생하여 인력이 태부족이란다. “아무리 짜내도 탈 사람이 형님밖에 없습니다” 애원하는 후배의 말에 차라리 웃으며 답했다. “그래, 퇴직하면 실컷 놀건데 뭐..” 크리스마스이브인 24일 저녁, 나는 부산신항만으로 출근해 33량 컨테이너열차를 경부선으로 끌고 나갔다. 등뒤에서 쿵쿵거리는 디젤기관차의 엔진소리가 정겹다. 기관차위에서 흰머리소년이 될 때까지 보낸 지난 세월처럼 남성현터널 주변에는 흰 눈이 쌓여있다.
돌아보면 대한민국의 역사만큼 철도도 격변의 시기였다. 124년의 철도역사를 거슬러 100년 동안 바뀐 것보다 최근 20년 동안 바뀐게 더 크다고 할 정도였으니.. 처음 입사했을 때는 한 달에 온전한 휴일 하루를 구경하기 힘들었다. 군대막사 같은 곳에서 잠시 눈 붙이고 근무 나가기 일쑤였던 처지에서 지금은 매월 8~10일의 휴일이 보장된다. 고속철도가 씽씽 달리고 낡은 선로도 새 노선으로 바뀌었으니 천지개벽이 따로 없다. 그런데 이런 철도를 등지고 나오는 마음이 천근이다. 윤석열정부가 들어서면서 철도구조조정 공세가 드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30년 내내 철도민영화에 맞서 싸우다 나가는데 다시 차기 철도공사 사장에 분할민영화론의 선두주자나 전임 경찰청장출신까지 거론된다고 한다. 후배들은 또 얼마나 길바닥 위에서 외쳐야할 것인지 짐작마저 아득하다.
인사가 실제 그리된다면 정부는 철도노동자들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것과 진배없다. 그래서 더욱 가능성이 높다. 윤석열정부는 화물연대파업을 진압하면서 노동자들과 전쟁을 치르면 지지율이 올라간다는 계산법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어디 철도뿐이랴? 국회 앞에서는 이 엄동설한에 노동법2조,3조 개정을 요구하는 노동계의 단식이 27일째 이어지고 있다. 올해 대우조선해양이 파업을 주도한 하청노동자 5명에 제기한 손배청구액수 470억원은 시급1만원 남짓인 하청노동자 약1900년치 임금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노동법2조 개정은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단결권을 보장하기 위함이고 3조 개정은 쟁의행위로 인한 손배청구를 제한하기 위한 방편이다. 윤석열정부는 한사코 이 법의 개정을 가로막을 것이다. 그들은 법인세 신고 대상 90만 개중 상위 0.01%에 해당하는 103개 법인의 법인세를 3% 깎아주는데는 진심인 반면 대기업의 이익에 반하는 노동자들의 요구는 제압해야 지지율이 오른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울한 세밑이다. 한해 내내 대한민국은 정부가 나서서 계급계층간 갈등을 부추겨왔다. 검찰공화국이 지지율을 끌어올리는데 북한 때리기와 노동자 때리기가 가장 효과적이라는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내년에도 갈등은 이어질 것이다. 희망은 한 가지 뿐이다. 12월 북극한파와 기록적 폭설이 한반도를 휩쓸지만 광화문을 위시해 전국 각지에서 촛불행진이 주말마다 이어진다. 이태원역에는 추모집회가 불을 밝힌다. “불의가 법이 될 때 저항은 의무가 된다”고 토머스제퍼슨이 말했듯이 거리의 저항이 얼마나 확대되는가에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좌우될 것이다. 시간 많은 퇴직백수 주말마다 할 일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