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친다. 슬기로운 사람이나 그런 공부에 대해 얘기할 때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어구(語句)다. 우리 속담(俗談)이라고도 하고, 문자 속 좀 든 이는 선비의 속성(屬性)이라고 한다. 그런데 오해다.
속담처럼,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된다. 이 말의 전파력과 매력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속담이 아니다. 첫 번째 오해다.
또 하나는 공부하는 사람을 뜻하는 우리말 선비를 한자 士(사)로 추측해 ‘하나(一) 들으면 열(十) 안다는 데서 온 말’이라고 푸는 오해다. 개연성(蓋然性)도 있고 멋진 센스의 추리지만, 어원인 갑골문을 보면 그렇지 않다. 士는 감옥을 지키던 벼슬아치의 도끼 그림이다.
인터넷 페이지의 글. ‘속담에 하나 들으면 열 안다는 말 있잖아요? 한문으로는 어떻게 표현하나요?’ 어떤 이가 ‘문일지십(聞一知十)이란 사자성어가 있다.’고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익숙해져서 우리 속담으로 아는 것이다.
들을 문(聞), 귀 이(耳)자가 뜻 짐작을 돕는다. 의미요소다. 소리 담은 門(문 door)은 소리요소다. 신문사(新聞社) 할 때의 聞이다. 한자 구성 중 뜻과 소리의 짜임인 형성(形聲)문자다.
속담도 일(一)과 십(十) 선비론도 오해라면, 바른 해석 정해(正解)는 뭐지? 공자님 말씀이라네. 聞一知十은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 편이 출처다. 전후 줄거리다.
《부자(富者)로 공자 주유천하(周遊天下)의 ‘군자금’을 대는 돈줄인 제자 자공(子貢)에게 공자가 물었다. 너와 안회(顔回) 둘 중 누가 (공부가) 더 나으냐? 자공 왈, 저를 안회와 견줄 수 없습니다.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그걸로 열 가지를 알지만, 저는 두 가지를 압니다...》
자공의 지식에 대한 겸양(謙讓)의 미덕도 보이지만, (안회 같은) 좋은 공부를 하는 사람은 하나를 들어 열을 아는 ‘방법’을 아는구나 하는 측면으로 볼 수도 있겠다. 요즘 말 솔루션 즉 해법이다. 해법(解法), 궁금하거나 부럽지 않은가?
우리 한국의 공부(학문)가 어쩌다 현대사 1백년에서 놓치고 있는 ‘말(언어)의 본디’가 그 솔루션임을, 이제는 정색하고 되돌아볼 때가 됐다.
문해력(文解力)의 解는 소(牛 우)의 뿔(角 각)을 칼(刀 도)로 도려내는(해체하는) 것이다. 이 3개의 이미지가 만나 ‘풀(어내)다’는 뜻의 말을 빚었다. 각각의 저 글자들은 세련된 그림이다. 3천5백 년 전에 만들어져 지금도 수준 높은 개념을 거침없이 표현한다.
牛 角 刀의 각 단어들은 또 수백 개의 다른 이미지를 표상(表象)하는 데 쓰인다. 레고처럼. 저 그림들의 인류학적 의미, 여태까지 세상 모든 추상화가들의 상상력을 합친 것과 비교될 수 있을까? 문자(文字·한자)는 이렇게 한국 등 동아시아의 보물이다.
聞一知十의 지혜, 그 중심인 ‘말’의 이치(文理 문리)를 명상하자. 언어의 해상도(解像度)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