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남자가 전시장 작품 앞에서 고개를 떨군 채 울고 있었다. 겨우 마음을 가눈 듯 다른 자리로 옮겨 전비담 시인의 ‘공무도하公務渡河’ 시를 읽다가 결국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내어 운다. 그의 여식이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 ‘별’이 되었단다. 애통하고 분통이 터져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한다. 공무원인 그는 정치적 중립 의무 때문에 유가족협의회 활동을 할 수도 없고, 영정 사진을 분향소에 올릴 수도 없단다.
“아침마다 아이의 방문을 열어봅니다. 어떤 때는 평소처럼 이름을 부르기도 하지요. 늘 방을 따뜻하게 해 두지만 휑하기만 한 아이의 방을 보면서 내 아이가 죽었다는 자각이 들 때면 한참을 멍하니 서 있게 됩니다. 아침 마다요.”
다 키운 자식이 죽었는데, 왜 죽었는지 따질 수 없는 나라, 슬픔을 내비칠 수도 없고 가족끼리 숨죽이고 살아야 하는 나라에 지금 우리는 살고 있다.
지난 2월 1일부터 16일까지 인사동 갤러리 ‘아르떼 숲’에서 열린 ‘못다 핀 청춘, 10·29 이태원 참사 넋기림’ 전시가 많은 시민의 관심 속에 막을 내렸다. 이 전시에는 40명의 화가와 시인이 참여해 이태원 참사를 주제로 시와 에세이, 담론과 같은 글과 함께 설치와 영상, 평면 등의 회화 작품을 선보였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그 가족의 원통함에 공감하자고 기획된 전시이다. 한편으로는 청년의 문화를 백안시했던 기성세대의 반성이고, 이태원 문화를 퇴폐한 것으로 여겨온 일부 주류문화에 대한 대거리이기도 했다.
어쩌면 핼러윈 축제를 ‘서양 귀신’ 놀이라 하고, 이를 즐기는 젊은이들을 철부지로 여겨온 우리가 이태원 참사의 공범일지도 모른다. 정부가 차린 분향소에는 영정이 없고, 희생자는 있으나 명단이 없었다. 참사가 아니라 사고라 했고, 희생자가 아니라 사망자로 불렀던 권력은 희생자 명단을 공개했다는 이유로 해당 언론사를 압수 수색하기도 했다.
그들은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살아야 하는 유족을 향해 ‘시체 팔이’라 운운하는 자들의 인식에 기생한다. 정치적 진영에 갇힌 그들의 생각은 이데올로기가 되어 청춘의 애먼 죽음 앞에서도 편을 나눈다. 어찌해서 저급한 정치판에 국민이 놀아나게 됐는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국민에게 국가란 무엇이어야 하는지 저들에게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10·29 이태원 참사는 우리가 국가의 주인으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깨우쳐주었다. 수백의 청년을 차디찬 바다에 수몰시킨 세월호 참사로도 모자라 이태원 참사에서 159명이나 되는 청춘의 목숨을 또 앗아간 권력에게 국가의 주인이 누구인지 가르쳐야 한다.
희생자 또래의 아이돌 그룹 BDC가 부르는 ‘별이 될게’라는 노래를 듣다 보니 별이 된 그들이 가족에게 보내는 마음이 읽어져서 가슴이 저민다. 이처럼 예술은 시대의 의제를 상정한다. 참사가 주는 교훈을 국민이 되새기고 다짐하자는 뜻으로 정기적인 예술행사를 펼치면 어떨까? 여기에 드는 돈은 권력에 손 내밀지 않고 십시일반 모금을 통해 우리의 의지를 보여주자.
여러 층층의 예술이 각각의 방식으로 승화된 작품은 인류의 선한 가치를 담아내는 문화행사로 뿌리내리게 될 것이다. 핼러윈 축제가 무엇인가? 로마 가톨릭 권력의 핍박에 항거한 힘없는 민족들의 문화운동이었고, 행위예술이었다. 이태원 참사가 기억할 것을 기억하고, 다짐할 것을 다짐하는 예술로 승화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