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적 도시는 계획된 도시이다. 국가는 도시를 계획하고 건설하면서 사회주의적 이념을 공간에 투영한다. 사회주의적 도시의 가장 큰 특징은 도시 중심에 광장이 있고 기념비나 동상, 문화시설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자본주의 도시와 반대로 사회주의적 도시는 금융시설이나 소비를 위한 쇼핑센터보다는 문화시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사회주의적 도시 설계자들의 생각이다.
그럼에도 식민시기 최초의 기업도시를 만들었던 흥남은 일본인들이 이주하여 쾌적하게 살 수 있는 공간을 기획하고 건설되었다. 고급시설을 갖춘 일본인 거주지는 구역으로 나뉘어 등급에 따라 거주했다. 이를 ‘흔히 보는 도시의 모양과 다른 소련식 신흥도시였다’고 기록한다.
“흥남은 20년도 안 되는 사이 흥남부(府)로 되고 인구 약 18만 명의 함남도 제1의 대도시로 되었다. 일본인 인구는 조선 전체에서 제3위이고 물동량은 하루 1만 톤에 이르렀다. 쇼와(昭和)초기부터 동양 제일의 화학공장이 생겨난 것은 대 수력 발전에 의해 풍부하고 싼 전력이 개발된 것과 더불어 일본 질소 노구치(野口)사장의 강렬한 의욕과 젊은 기술진의 총결집 나아가 개발을 지원하는 자금원이 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공장의 부대설비로는 스스로 건설한 조선제일 병원을 비롯하여 학교 우체국 관청 사무소 경찰 집회소 대 체육관등이 있었다. 사택은 수세식 변소와 증기남방 까지 완비하는 등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공장 도시로서 종합계획 하에 건설되었다.”
해방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전쟁으로 함흥-흥남은 폐허가 되었다. 특히 흥남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전후 함흥-흥남의 공장복구에는 구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국가들이 참가했다. 공장의 복구와 신설에 소련기술자들이 참가했고, 함흥-흥남의 도시건설에 1954년부터 1962년까지 동독도시기술자들의 지원을 받았다. 당시 통역으로 참여했던 2019년 출간된 신동삼의 저서 『함흥시와 흥남시의 도시계획』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동독인들은 함흥의 중심거리와 일부의 살림집을 건설하고 철수했다.
김일성은 전쟁이 끝나고 함흥을 체제 선전을 위한 ‘로동계급’의 도시로 만들려고 했다. 함흥-흥남은 화학공업 중심지로 산업시설이 밀집해 있어 근로자들이 많다. 이러한 특성으로 소 도시 계획과는 예외로 대규모 화학공업 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사회주의적 도시는 1980년대 형태를 갖추었다. 1980년대 도시중심에는 대극장과 함께 광장과 기념비가 세워졌다. 도시중심에 있어야 할 김부자 동상은 동흥산 언덕(반룡산)에 위치해 있다. 함흥-흥남은 일제강점기부터 반체제 세력인 국내 공산주의자들의 거점으로 ‘지방주의’ 색채가 강한 지역이다. 해방 후 김일성은 이러한 세력과 권력을 다투어야 했던 시기도 있었다. 사회주의 화학공업도시로 계획된 함흥-흥남은 ‘고난의 행군’이라는 어려운 시기를 거쳐 현재는 물류유통의 중심지로, 해양과 대륙을 잇는 동해안의 중요한 도시로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