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휘의 시시비비] ‘철밥통’ 깨지는 소리(?)

2023.04.11 06:00:00 13면


 

왕의 나라 조선의 역사에서 정도전은 신권국가(臣權國家)를 꿈꾼 발칙한 혁명가였죠. 태종 이방원에게 되치기당해 뜻을 다 이루지는 못했지만, 당시 정도전의 이상에 동조한 여론이 있었다는 것은 무소불위 왕권국가(王權國家)에 대한 민심의 저항이 만만찮았다는 정황을 반증해요. 조선의 역사를 아예 ‘신하의 나라’로 보는 해석도 있어요. 마음에 안 드는 왕들은 독살로 명을 끊곤 했었다는 끔찍한 주장까지 나와 있죠. 


현대정치에서 테크노크랫(technocrat 기술관료) 세력이 권력의 핵으로 등장한 것은 우연한 결과물이 아니에요. 인구가 늘고, 문명이 발달하고 문화가 다양해지면서 칼 잘 쓰는 무사들 둘러 세우는 일로만 리더 십이 발휘되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테크노크랫이 직접 권력자가 되는 일도 전혀 이상하지 않게 됐어요. 


젊은이들이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선망(羨望)해 온 역사는 깊어요. 5급 행정·외무·사법고시라는 현대판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이 집단을 이뤄 공부하는 신림동 녹두거리가 가장 먼저 생겨났죠. 그리고 21세기 들어 9급, 7급 공무원 열풍이 일면서 공시생들이 즐비한 노량진까지 고시촌이 늘어났지요. 2009년부터 2019년까지 청년층이 가장 선호하는 직장 1위가 공무원이었다는 통계청 조사도 있어요. 


그런데 며칠 전 우리 공무원 중 절반가량이 ‘기회가 있다면 이직하겠다’고 밝혔다는 한국행정연구원의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네요. 중앙 및 광역자치단체 공무원 중 45.2%가 이직 의향을 표명했어요. 조사에 처음 포함된 기초단체 공무원 중 이직 의향 공무원은 46.8%로 중앙·광역보다 1.6% 포인트 높게 나타났군요. 지난 2017년에는 28.0% 수준이었으니 불과 5년 새에 두 배 가까이 치솟았군요. 


‘철밥통’이라고 불리던 공무원직의 인기가 시들해진 건 요 몇 년간의 추세였어요. 작년 6월 국가공무원 7급 공채 시험 경쟁률이 42.7대1을 기록하자 ‘43년 만에 최저 수준’이라는 호들갑 기사들이 떴었죠. 인재들이 첨단기업이 아닌 공직에 몰려드는 것은 ‘후진적’ 현상이라던 전문가들의 맹비판이 기억나네요. 드디어 ‘철밥통’ 깨지는 소리가 시작됐나요? 이제 바람직한 직업의식이 자리 잡나요? 미안하지만 대답은 “NO”예요. 


젊은 세대의 가치관 변화가 가장 큰 원인일 거예요. ‘철밥통’으로 인식됐던 그동안의 공시 열풍 원인을 다 소각하고도 남을 만큼 아이들은 생각이 달라졌어요. 공직 진출 기피, 이직 바람은 ‘박봉(薄俸)’과 ‘격무(激務)’탓이라는군요. 그동안의 열풍을 테크노크랫 출세욕이나 애국심 발로로 해석할 수 없듯이, 조건이 열악한 직업이라면 ‘무조건 싫다’는 풍조 때문이라는 거죠. 왕도 권신도 아닌 국민이 나라의 주인인 시대에 공무원의 의식은 이제 어디로 가나요? ‘철밥통’ 깨지는 소리는 좋다고 쳐도, 대한민국의 미래는 과연 괜찮은 걸까요?

안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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