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랑 내기하실래요. 주여, 그 자를 나의 길로 인도하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장담하는데 주님께선 그 자를 잃게 될 것입니다.”

 

신과 천사들이 모인 자리, 악마 메피스토가 등장해 마이크를 든다. 그는 악랄한 인간들 때문에 “지금 지상은 최악”이라며 불평을 늘어 놓고는 신에게 내기를 제안한다. 신의 종인 노학자 파우스트를 유혹해 타락시킬 수 있는지, 없는지.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20대부터 죽기 직전까지 60년에 가까이 걸쳐 완성한 대작 ‘파우스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괴테의 청년시절부터 고전주의에 심취해있던 중년, 이상향을 꿈꾸던 노년까지 그가 그린 일생의 사유와 철학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다.

 

지난달 31일부터 서울 LG아트센터 무대에 올라 관객을 만나고 있는 연극 ‘파우스트’는 이 중 ‘비극 제1부’를 다룬다. 파우스트가 메피스토와 영혼을 건 계약을 맺으며 벌어지는 이야기로, 인간이 가진 고뇌와 욕망을 드러낸다.

 

 

많은 사람들에게 현자라는 칭송을 들을 만큼 철학, 법학, 의학, 신학 등 평생동안 학문에 매진해온 파우스트.

 

그는 평생을 바친 연구들에도 결국 “인간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감에 빠져 있다.

 

이 때, 검은 개의 모습을 한 악마 메피스토가 파우스트 앞에 나타나 모든 감각이 깨어날 만큼의 쾌락을 알려준다고 하며 그 대가로 파우스트의 영혼을 요구한다.

 

“어떤 옷을 입건 어떤 인생을 살건 이 비좁은 서재에서의 내 삶은 변함이 없을 걸세. 인생을 즐기기에는 나는 너무 늙었어. 내 존재 자체도 부담스럽고, 죽기만을 바라니.”

 

기대되는 것은 죽음뿐이던 파우스트는 결국 메피스토의 제안을 수락하고, 마녀의 영약을 마셔 젊어지게 된다.

 

청년이 된 파우스트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여인 그레첸을 보고 한 눈에 반하고, 메피스토의 능력을 빌려 그레첸의 방에 보석들을 가져다 놓는 등 결국 그레첸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고전이지만 20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도록 ‘파우스트’가 회자되는 이유는 파우스트가 가진 고민들이 현재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작품의 연출과 각색을 맡은 양정웅 연출은 지난달 열린 연습현장 공개를 통해 “시대와 공간, 문화와 언어를 뛰어 넘어 인간의 보편성과 본질을 잘 다룬 작품이기에 2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것 같다”며 “특히, 메피스토의 대사들은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양 연출은 고전 작품인 ‘파우스트’에 현대적 무대를 더해 세련된 165분(인터미션 15분 포함)을 만들었다.

 

첫 장면인 천상의 서곡부터 신과 메피스토의 빛과 어둠의 세계가 대립된다. 무대 위 대형 LED패널을 통해 신과 빛을 상징하는 세계를 선보이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을 아우른다.

 

1막, 2막에 걸처 총 26번의 영상 전환이 이뤄지는데, 게임에서 사용하는 언리얼엔진을 기반으로 구현된 입체 영상을 활용했다. 등장인물이 실재하는 공간을 영상으로 담아 관객에게 새로운 경험을 전한다. 특히, 그레첸의 방은 무대 뒤편에 마련된 공간에서 영상을 통해 라이브로 송출된다.

 

또한, 작품 안에서 인간 세계의 4대 원소인 공기, 물, 불, 흙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흙은 탄화 코르크로 표현해 질감을 살렸고, 공기는 천정에 설치된 12개의 팬으로 입체적인 바람을 일으킨다.

 

 

자칫 어색할 수 있는 예스러운 대사들은 배우들의 연기로 극복된다.

 

노년의 파우스트 역을 맡은 배우 유인촌은 1996년 연극 ‘파우스트’에서 악마 ‘메피스토 텔레스’ 역을 연기한 이후 약 27년 만에 동명의 작품으로 돌아왔다.

 

그는 차분하면서도 또렷한 발성으로 인생의 회의감에 빠져 있는 노학자의 고뇌를 보여 준다.

 

유인촌은 연습현장 공개에서 “예전에 메피스토를 할 때에는 파우스트가 이렇게 고통스러운 인물인지 몰랐다”며 “욕심도 부려야하고, 그럼에도 격이 떨어지면 안되고, 인간으로서 많이 가진 인물이기에 표현하기가 어렵다”고 작품에 대한 고민을 전하기도 했다.

 

‘오징어게임’, ‘수리남’ 등을 통해 국내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배우 박해수는 메피스토 역을 맡아 색다른 매력을 선보인다.

 

그는 익살스러운 표정과 말투의 장난기 가득한 악마의 모습이지만, 파우스트의 파멸과 타락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표독스러운 속내를 연기한다.

 

또한 그의 유행어 중 하나인 “식사는 잡쉈어?” 등 재치있는 대사로 관객의 웃음 유발까지 담당한다.

 

 

젊은 파우스트 역을 맡은 배우 박은석은 쾌락에 빠져 유희를 즐기는 철없는 모습과 그레첸을 위험에 빠뜨려 혼란스러운 모습까지 풍부한 감정을 전한다.

 

이번 작품으로 첫 연극 도전에 나선 배우 원진아는 그레첸으로 분해 사랑을 시작하는 풋풋한 소녀부터 모든 것을 잃고 절규하는 마지막 장면까지, 2막을 종횡무진 누빈다.

 

두 명의 파우스트와 메피스토, 그레첸 등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배역은 원캐스트이다. 공연은 4월 29일까지, 서울 LG아트센터.

 

[ 경기신문 = 정경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