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맞선 새빨간 책 한 권, 뮤지컬 ‘레드북’

2023.04.18 08:46:55 10면

보수적이던 영국 빅토리아 시대 배경
편견·비난을 깬 여성 ‘안나’의 이야기
젠더 이슈를 유쾌하게 풀어낸 작품
옥주현·박진주·민경아 등 출연
5월 28일까지, 서울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빵집 주인 : 왜 여자가 일을 하려고 그래. 남자가 없어?

안나 : 아니오. 돈이 없어요.

빵집 주인 : 그래 그러면 저기 몸 쓰는 건 잘해?

안나 : 네 잘하죠.

빵집 주인 : 얼마나 잘하는데?

안나 : 저 무거운 것도 들 수 있고, 이런것도 혼자 들 수 있어요.

빵집 주인 : 아니, 아니, 아니. 그런 거 말고, 남자한테 쓰는 거.

 

지금으로써는 상상할 수 없는, 경악할 만한 대화가 오가는 19세기 런던의 한 거리. 여자가 일을 하는 것에 의문을 품으며, 미혼 여성은 재산을 가질 수도 없는 불합리한 제도가 만연한 사회다.

 

그러나, 위와 같은 수치심 유발 화법에도 절대 기죽지 않는 여성이 있다.

 

“저한테 왜이렇게 찝적거리세요. 아 발정나셨어요? 그래서 거시기 대신 주둥이로 푸시는 거예요? 이참에 그거 떼버리세요. 감당도 안 되고 관리도 못 하는 거 확 떼버리는 게 편하실 것 같은데, 적선하는 셈치고 제가 도와드릴까요? 골라보세요. 뽑아드려요? 잘라드려요?”

 

자신을 희롱한 빵집 주인의 말을 시원하게 맞받아치는 ‘안나’. 첫 등장부터 심상치가 않다. 빵집 주인과 옥신각신 말다툼을 벌이던 그는 결국 경찰에 연행되고, 벌금이 없어 철창에 갇힌 신세임에도 “난 슬퍼질 때마다 야한 상상을 해”라며 예상치 못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지난 달부터 서울시 종로구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관객을 만나고 있는 뮤지컬 ‘레드북’은 보수적이었던 영국 빅토리아 시대(1837~1901년)를 배경으로, 주어진 역할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 그저 ‘나’로 살고 싶은 여자 안나가 세상의 편견과 비난을 깨고 작가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여성에게 유독 엄격했던 그 시절, 안나는 자신이 하녀 생활을 하며 모셨던 ‘바이올렛’ 부인의 손자이자 법률대리인인 ‘브라운’을 만나며 세상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는다.

 

브라운이 건넨 말 한마디, “당신에게는 기적을 만드는 능력이 있어요. 그 능력을 키워봐요. 내가 응원할게요”가 안나를 움직였다.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이야기 쓰기에 뛰어든 것.

 

여성이 자신의 신체를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되던 시대, 안나는 당당히 19금(?) 소설을 써내려간다. 심지어 실명으로. 이에 안나의 글이 담긴 레드북의 출간을 막고, 안나를 벌하자는 시민들의 움직임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전개된다.

 

 

그럼에도 안나는 쉽게 꺾이지 않는다. 자신의 글이 대중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을 찾아보자며 재판을 앞두고 브라운을 설득한다.

 

‘레드북’은 자칫 민감할 수 있는 ‘젠더 이슈’를 무겁지 않게, 발랄한 음악과 유쾌한 대사로 명랑하게 풀어간다.

 

안나는 브라운과 사랑에 빠진 수줍은 눈빛부터 평론을 빌미로 접근한 남성 대문호 ‘존슨’을 따끔히 혼내주기까지 공연 내내 통통 튀는 매력을 발산한다.

 

특히, 10년 만에 다시 뮤지컬 무대를 찾은 배우 박진주는 맑은 음색과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안나를 담아 관객의 호평을 이끌어낸다.

 

 

당연한 것이 당연치 않던 세상에 맞서 스스로를 찾아나서는 안나를 만날 수 있는 뮤지컬 ‘레드북’은 오는 5월 28일까지 공연된다.

 

안나 역에 박진주를 비롯해 옥주현, 민경아가 무대에 오르며 브라운 역에 송원근, 신성민, 김성규가 출연한다.

 

[ 경기신문 = 정경아 기자 ]

정경아 기자 kyunga1013@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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