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에세이] 그 시절의 먼 풍경

2023.05.01 06:00:00 13면

 

어버이들은 선조들 경험과 자신의 체험을 통해 터득한 철학을 속담이란 이름으로 보존 전수해 왔다. 서양의 이름 있는 철학자나 동양의 공자 맹자의 언어와 문장보다 더 실감적이고, 무릎을 치며 ‘옳거니’ 싶은 함축된 인문학적 도(道)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속담은 평범한 사람들의 철학이요 조상의 걸러진 넋의 결정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속담을 뒤집어 재미있게 비아냥대듯 표출하면서도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웃음의 미학으로 삼고 있다. 에를 들어 본다면, ‘인생을 짧고 예술은 길다’는 철학적 경구를 ‘인생은 더럽고 예술은 비싸다.’고 한다. 또한 ‘헌신하면 헌신짝 되고, 일찍 일어난 새는 늙은 새다.’라는 언어적 유희 같은 말도 등장시킨다.

 

조그마한 거리낌에도 밤잠을 설치며 괴로워하는 나는, 내 몸에 살이 머물지 못하게 학대를 하는 편이다. 그런 나의 성깔을 스스로 미워하며 두 번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하늘을 뚫어지게 처다 보기도 했다. 무디지 못한 성깔은 타협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범하게 나서지 못하고 다가오는 사사건건이 근심스러웠다. 그러한 내가 무슨 행복과 효도와 영광의 시간이 있었겠는가! 하고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살아남은 앨범을 넘겨보았다. 어머니 회갑 때 아버지와 함께 잔칫상 앞에 앉아 있는 부모님 사진이 눈앞에 펼쳐졌다.

 

두세 장 더 넘기니 ‘축 김경희 수필집/ 둥지 안의 까치 마음 출판기념회/ 1986. 11. 8’이라고 쓰인 큼지막한 글씨가 새겨진 현수막이 벽면에 걸려있다. 이어서 내가 평생 스승으로 모신 고하(古河) 선생님과, 재직하고 있었던 당시의 대학교 기획실장의 축사 모습, 그때 초등학교 다니던 딸아이는 색동옷에 붉은 치마를 입고 제 오빠와 나란히 서서 내가 작사하고 김성진 교수가 작곡한 ⸀우리 가정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다른 사진에는 아버지 어머니 아내와 내가 앉아 있는데, 행사가 끝나고 돌아가기 직전 김성철 박사가 부모님께 축하 인사를 건네는 모습도 정지된 영화의 장면처럼 그대로 남아 있다. 나는 남에게 자랑할 것도 속살일 것도 없다. 그렇지만 이때만큼은 작은 흥분이요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내 삶의 먼 풍경을 보고자 앨범을 더 넘겨보았다. 한국 땅의 이름 있는 산을 찾아 오르고 내리고 하던 시절의 내 사진이 많이 드러났다. 그리고 어머니가 적갈색 비단 두루마기를 입고 지금은 중학생이 된 유치원생 막내 손자의 손목을 잡고 있는 사진이 퍽 정답게 느껴졌다.

 

얼마 전에는 교수요 학자로서 고위직에 있었던 분의 북콘서트를 가보았다. 정권이 바뀐 뒤 현직에 있을 때의 일로 역풍을 맞아 힘든 세월을 보낸 사람이지만 그 힘든 세월과 바람 속을 묵묵히 걸으며 자신을 관리한 덕분에 지성적 고뇌의 세련미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의 앎의 넓이와 깊이만큼의 이야기가 있었다. 뒷부분으로 가서는 정치를 위한 동지들의 의지가 담긴 토크쇼가 되어 재미도 있었다. 얼마 뒤엔 선거가 있을 것이다. 그때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역할을 은유적인 메시지로 들려주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양궁선수들이 과녁 앞에서 활시위를 당기며 금메달을 따고야 말겠다는 모습에 비유되기도 했다. 행사가 끝나고 걸어오면서 나는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래 뜻대로 하시게, 인생은 누구나 시간이란 화살표 위에 얹혀 죽음으로 가는 것이라네.’라고.

김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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