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소] 이민의 출발점 인천...중구 ‘데쉴러 주택 터’와 미추홀구 ‘인하대 하와이교포기념관’

2023.05.21 11:13:37 인천 1면

동서개발주식회사, 1902~1905년까지 7415명 하와이 이주
하와이교포 성금으로, 1973년 ‘하와이교포기념관’ 준공

 

9. 이민의 출발점 인천...중구 ‘데쉴러 주택 터’와 미추홀구 ‘인하대 하와이교포기념관’

 

120여 년 전, 인천은 이민 역사의 출발점이었다.

 

1902년 12월 22일 121명의 한국인이 제물포항(인천항)에 모였다. 121명 중 86명이 인천지역 출신이었다.

 

이들은 일본 나가사끼항을 거쳐,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했다. 신체검사 등을 통과한 86명만 하와이 땅을 밟을 수 있었다.

 

하와이 이민은 처음으로 국가가 허락한 공식 이민이다.

 

고종 황제는 주한 미국 공사인 알렌의 설득으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한국인 이민을 인정했다. 하와이 이민 사업의 책임자로는 미국인 사업가 데쉴러(Deshler)를 임명했다.

 

인천 중구 송학동 인성초등학교 자리에는 ‘데쉴러 주택’이 있었다. 데쉴러 주택은 서양식 저택과 일본식 저택이 어우러지는 대저택으로, 현재 ‘터’만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곳은 주거 겸 동양합동광업회사 사옥으로 사용됐다.

 

데쉴러는 이민 사업을 위해 인천 중구 내동 옛 인천예식장터에 ‘동서개발주식회사’와 ‘데쉴러 은행’을 설립했다.

 

동서개발주식회사는 이민 모집과 송출을 담당했으며, 안정수·현순 등 독립운동가가 통역관으로 일했다. 데쉴러 은행에서는 이민 자금을 대주었다.

 

처음부터 이민 모집이 수월하진 않았다.

 

당시 한국인 정서상 조국을 떠나는 게 꺼려졌기 때문이다. 이때 인천 내리교회의 담임 목사였던 존스가 나서 교인들을 설득했다.

 

동서개발주식회사는 1902년부터 1905년 후반 이민이 금지될 때까지 64회에 걸쳐 7415명을 하와이로 보냈다.

 

 

하와이로 이주했어도 교민들은 고향 땅을 잊지 않았다.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이주 50주년 기념사업으로 미국의 MIT와 같은 공과대학을 인천에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에 인천시가 땅을, 정부는 건립비용을 제공해 1954년 인하공과대학이 개교한다. 여기서 인하는 ‘인’천과 ‘하’와이의 줄임말이다.

 

실내체육관인 ‘하와이교포기념관’은 하와이교포의 성금으로 1973년 지어졌다. 성금은 한인기독학원을 팔아서 마련했다.

 

현재 인하대 배구부가 하와이교포기념관을 이용하고 있다.

 

이곳의 출입문 양옆에 상징물이 각각 서 있는데, 오른쪽에는 하와이교포기념관 안내판도 자리를 잡고 있다.

 

학교설립기념식수는 1954년 4월 5일 식목일을 맞아 심어졌다. 인하공업전문대학교 교문에서 직진하면 푸르른 느티나무를 만날 수 있다.

 

인천은 이민의 역사를 계속 써가고 있다. 최근 750만 재외동포 관련 정책과 사업을 총괄하는 재외동포청 유치에 성공했다.

 

재외동포청은 151명의 조직 규모로 다음 달 5일 출범한다.

 

 

[ 경기신문 / 인천 = 김민지 기자 ]

김민지 기자 shfkd@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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