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쪽 고향에 있을 때 옆집으로 함흥여자가 시집왔다. 목소리도 굵고 행동도 씩씩한 그는 결혼 전까지 직장 출근하면서 단 한 번도 지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러한 성실함으로 당시 직장생활을 하면서 어렵다는 입당도 했다. 공로가 커서인지 함흥여자는 내가 사는 동네에 시집와서도 괜찮은 직장 간부를 하게 되었다. 함흥여자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다른 사람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아 참으로 피곤했다. 어려웠던 1990년 고난의 행군 시기가 되자 많이 유연해졌다. 본인 자신도 아이 넷에 시부모까지 살려야 하는 생사의 기로에 있었다. 그리고는 동네에서 제일 먼저 장사를 시작했다. 장사라고 하면 부끄러워할 때 체면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나 했다.
나는 함흥에 외사촌들이 살고 있고, 친언니도 그곳으로 시집을 갔기에 함흥으로 자주 다녔다. 그때 만났던 함흥여자들은 억척스럽다. 억양이 높은 함흥 사투리로 말시비가 붙으면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몸치장은 덜 하더라도 집 안에 있는 그릇은 빛이 나도록 반짝이게 닦는다. 남쪽에서 함흥 출신을 만나게 되는데 그때마다 개성을 확실하게 나타내는 함흥여자들로 어쩔 수 없는 지역 특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북쪽에서는 함경도 여자를 최고의 신붓감으로 꼽는데 그 중 함흥여자들이 그렇다.
이름이 알려진 함흥 출신 여성에 대한 자료를 보면 조선 시대인 18세기 김삿갓의 일화로 유명한 가련(可憐)이라는 기녀가 있다. 가무에 능했던 가련은 시도 뛰어나게 잘 지어 당대에 그와 겨를 대상이 없었다고 한다. 지혜롭고 총명한 가련은 자신과 맞수를 할 사람이 없어 통곡을 잘했고, 84세까지 예인으로 칭송받았다. 김삿갓이 가련에게 쓴 이별 시 또한 가련해서 유명하다. 예인으로 역사에 전무후무했다는 가련이 함흥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한때는 번화했을 함흥을 상상하게 한다.
함흥 출신으로 조선희의 장편소설에 등장하는 주세죽이라는 여인이 있다. 아름다운 미모에 편안한 삶을 선택해도 되겠으나 그는 혁명이라는 회오리바람을 피하지 않았다. 상황은 운명을 예상치 못한 곳으로 내쳤고, 병든 몸으로 딸을 찾아 떠났다가 타향에서 운명했다.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그에 넋을 누가 달래줄까. 북쪽 고향인 사람에게는 누구나 친숙한 영화배우 문예봉도 함흥 출신이다. 문예봉은 북한에서 1949년 최초로 제작한 영화 ‘내 고향’에 출연하면서부터 사망하기까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함흥여자에 대한 글을 쓰면서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열변을 쏟던, 그리고 자식을 위해 헌신하던 함흥 출신 탈북 여성을 떠올린다. 가식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억양 높은 목소리, 자신이 먹으려 준비한 쑥떡을 불쑥 내밀던 함흥여자는 지금 머나먼 타향에 있다. 그리고 삶을 풍요롭게 가꾸며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함흥 출신의 탈북 여성이 주변에 적지 않음을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