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남자라면 형부를 떠올린다. 농촌사람의 순박함이 묻어나는 듬직한 체구가 세련된 도시남자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부모님이 언니와 결혼을 반대하니 속상한 형부는 어디가 그렇게 부족하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얼굴도 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건 다 싫다고 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건강한 체격에 듬직한 뒤 모습만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로부터 형부는 얼굴은 마주하지 않되 가능한 뒤 모습을 많이 보이려 노력했다. 뒤 걸음으로 들어오는 웃긴 장면도 있다. 형부와 언니가 결혼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야 부모님으로부터 인정받게 되었다.
도시에 살고 있는 함흥남자는 ‘함흥얄개’란 말처럼 만만치 않다. 함경남도 소재지인 함흥에는 큼직한 행정기관과 공장기업소들이 맞물려 있어 생산품도 많다. 화학공업도시로 ‘고난의 행군’때에는 마약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각지에서 여러 사람이 모이다 보니 팍팍한 도시생활에서 손익계산에 빠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말도 빠른 함흥남자와 말이 느린 형부와 향유하는 문화수준도 차이가 난다. 형부는 명절이면 농촌의 작은 문화공간에서 소소한 활동을 하는 반면 도시에서는 함흥대극장 중심에 모여 화려하게 성대하게 문화생활을 한다.
전통적 도시인 함흥과 근대적 도시인 흥남에는 문인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이북명은 일제강점기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흥남 질소비료공장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다. 한설야도 북한의 정치사와 문학에 영향을 주었다. 주인규도 함흥 출신이며 북한의 최초 예술영화인 ‘내 고향’ 촬영에도 참여했다. 한때는 문학계를 빛내던 사람들이 함흥남자들이며 정권 창출과 함께 숙청으로 이름이 사라지기도 하고 다시 복원되기도 했다. 특이하게 기억되기는 함흥남자 예술인이 시골까지 내려와 공연을 했었다. 여자처럼 날씬한 몸매에 날렵한 몸동작과 우아한 춤사위 구경에 빠져 함흥남자가 멋있어 보였다. 도시 중심에 있는 함흥 대극장을 지나면 표를 구매하라고 따라다니고 초면에도 데이트 신청하는 남자가 있어 시골에서 자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시골에서는 연인사이를 노출하기 꺼려하는데 함흥에서는 남자들이 적극적이다.
함흥남자들은 시장에 앉아 하루 종일 물건을 파는 여자들의 일손을 잘 돕는다. 남자가 장마당에 앉아있기는 그러하니 여자의 장사를 도와 진상고객을 처리한다. 큰 손으로 돈을 환전하거나 물건을 유통하는 일을 한다. 마약과 같은 위험한 물건을 겁 없이도 만들고 옮기는 작업을 함흥남자들이 한다. 한 때는 번영으로 가득했던 함흥이 ‘숨 죽은 도시’로 변했던 1990년대 이후 함흥남자들은 더욱 강해졌다. 이 시기 농부였던 형부도, 사촌오빠도 살아남지 못했지만 살아남은 함흥남자들은 함흥여자 못지않게 ‘함흥얄개’의 특성을 발휘했다. 조금도 손해 보지 않는다는 함흥얄개들은 한국에 와서도 자신들의 존재감을 과시하며 이름을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