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먼 자만이 될 수 있었다. 현악기를 들고 마을을 돌며 연주하고 노래를 불렀다. 서사시를 읊고 옛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대부분 문맹이었고 통신수단이 없었던 옛날, 사람들은 이들을 통해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전쟁이 났다더라. 왕이 바뀌었다더라. 역병이 돈다더라......
집시들의 삶만큼 원시적이고 낯설고 매혹적인 사람들. 그들끼리만 비밀리에 주고받던 언어가 있어 신비를 더하는 존재들. 이들은 우크라이나의 맹인 유랑 예술가로, ‘콥자’라 불렸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세월의 격변 속에서도 콥자를 예우하고 사랑했다. 글 배운 이들이 늘고 통신수단이 생기고 놀거리, 볼거리 넘치는 세상이 되어도 콥자를 기다렸다. ‘오직 사람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가 있기에. 그렇게 수 천 년 역사와 함께 해온 콥자들이 20세기를 만나면서 씨가 마르기 시작한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기원 전후, 이란 계통의 스키타이인과 로마제국을 뒤흔든 고트족, 훈족이 잠시 살았던 이 땅에 뿌리내린 이들은 서기 6세기경에 나타난 슬라브인들이었다. 이들은 (오늘날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이우’라는 도시를 세워 우크라이나 역사를 시작한다. 그러나 13세기 침입한 몽골의 2세기에 걸친 지배 후, 14세기에는 리투아니아, 폴란드, 터키, 몰도바의 땅 따먹기 전쟁터가 되었고 16세기,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의 식민지가, 18세기 말에는 러시아 속국이 된다.
1927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우크라이나 역사상 최악의 시기를 겪게 된다. 스탈린의 공업화 정책은 유럽의 곡창지대라 불렸던 농업국 우크라이나를 엉망으로 만든다. 농민 대거도시이주, 곡물 강탈 등의 폭압정책으로 3백만 이상의 아사자를 냈다. 또 민족말상정책으로 글과 말을 빼앗고, 민족문화를 거세했다. 망나니 칼춤같은 정책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본 부류가 콥자들이었다. ‘우크라이나인들의 이야기와 노래 등 전통을 전수하며 민족감정을 되살린다’는 이유로 무조건 잡아가 즉결처형시켰다. 안 그래도 현대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있던 콥자들의 씨가 말라갔다.
콥자가 부활한 것은 1990년 12월, 소련 해체로 우크라이나가 독립되면서다. 대학생들이 주축이 돼 ‘콥자’를 찾아 나섰다. 타국으로 도망갔거나 시골마을에 숨어 살거나 걸인이 된 콥자들을 한 명, 한 명 어렵게 찾아냈다. 콥자는 다시, 우크라이나의 상징과 정신으로 부활했다. 예술대학들은 콥자의 반두라를 가르치는 전공을 만들었고 콥자들의 연주는 거리뿐 아니라, 현대식 무대에서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유튜브에서도 반두라를 감상할 수 있는 시대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만이 비밀스레 주고받았던 언어, ‘레비카’가 비극적 역사의 격랑 속에 떠내려가버린 것. 소실된 것이다. 지금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서도 사랑을 하고 결혼식을 올리고 아이가 태어난다. 결혼식 중에 (콥자들만 연주하던)반두라 공연도 보인다. 우크라이나의 서러운 역사, 콥자들의 수난과 함께 현재 전쟁의 참상이 더해져 안 그래도 슬픈 반두라 소리가 사무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