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남을 수 있는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사진가는 마음의 눈으로 대상 인물을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마음이야말로 인물을 바라보는 진정한 렌즈이기 때문이다. -유섭 카쉬-
인물사진의 거장, 유섭 카쉬
1902년 아르메니아 공화국에서 태어나 2002년 사망한 카쉬는 터키인의 박해를 피해 시리아로 거처를 옮겼다. 16세 때 캐나다에서 사진관을 경영하는 숙부를 찾아가 1933년부터 사진관을 경영하면서 총독 부처(夫妻)를 비롯해 고관과 그들의 가족을 찍기 시작했다. 1941년 기념비적 인물인 윈스턴 처칠의 사진을 찍은 것이 LIFE지 표지를 장식하면서 유명해졌다.
그의 사진을 보니 첫인상이 해맑다. 사람의 모습 속에서 그 1초도 안되는 순간을 찾아 대상 인물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려면 감각, 재능, 기법..... 등 수없이 나열할 수 있는 그 무엇보다 작가 자신 속에 순수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의 표정이 말해주고 있다.
카쉬가 찍은 명사들의 포트레이트
그의 작품을 대표하는 것은 당연히 인물사진이다.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흑백의 강한 컨트라스트와 마치 직접 인물을 대면하여 보는 듯한 섬세한 감정이 드러난다. 또한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슬픔이나 번뇌, 의지 등 보다 인간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자 이제 그의 인물사진들을 한번 감상해 보자.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 1971
쿠바의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 대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와 강인한 독재자의 대명사로 불리는 피델을 찍기 위해 초긴장 하고 있던 카쉬에게 오히려 부드럽게 다가온 피델.
카쉬가 찍은 피델은 강한 눈빛의 혁명가임에 틀림없었지만 그의 눈동자 속에, 눈가와 눈 아래의 주름 속에, 구릿빛 피부와 수염 속에 혁명가와 독재자로서의 강인함과 내면에 숨겨진 쓸쓸한 고독이 저리도 배어 있는 건지. 나는 이 사진 앞에 오랜 시간 동안 서 있었고 급기야 주체할 수 없었던 눈물이 흘렀다.
▲오드리 햅번(Audrey Hepburn), 1956
로마의 휴일의 히로인 오드리 햅번.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가 출연한 영화를 보거나 사진을 보면 어느 한 군데에도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에 감탄을 자아내게 된다.
순수하면서 도도하고, 강하면서도 여린 그녀의 아름다움이 이렇게 완벽하게 사진으로 표현될 수 있다니 그저 놀랍다. 카쉬의 인물 사진 중에서는 드물게 흰색 배경으로 찍은 사진으로 햅번의 부드럽고 우아한 아름다움이 그의 옆얼굴의 이마와 콧선, 턱 선과 긴 목선을 통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941
윈스턴 처칠의 사진을 찍을 당시 이 사진에 나온 그만의 카리스마를 표현하기 위해 카쉬가 처칠의 시가를 빼앗아 낚아챘고 그것이 못마땅한 처칠이 이런 표정을 짓는 순간을 포착하여 이 명작을 완성했다는 일화는 꽤 유명하다. 이 사진이 바로 카쉬를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한 그 사진이다.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948
20세기의 지성의 대명사 아인슈타인에 대한 존경심에 불타 있는 카쉬는 인간의 불멸성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의견을 물었고 철학적이며 동시에 현실적인 인류의 파멸과 희망에 대한 대화를 나누게 됐다. 그때 카쉬의 눈에 비친 아인슈타인은 한 명의 인물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우주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 우주의 순간을 카쉬의 카메라가 포착한 것이다.
카쉬의 여러 사진에서는 특히 손의 표현이 아주 중요한데 손은 위치나 얼굴과의 거리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손은 마치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고 기도하는 듯한 그의 염원이 담겨 있다.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954
사랑과 헌신의 대명사 슈바이처 박사의 양미간 사이에 패인 주름과 아래로 감은 눈, 콧수염 아래 입가에 손을 괴고 있는 모습, 인류를 위한 고뇌하는 슈바이처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인도주이자인 그에게 카쉬가 물었다. "십계명 중에서 가장 큰 것이 뭔가요?" "예수는 단 하나의 계명만 주셨죠, 그건 사랑이에요." 슈바이처 박사가 대답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65
자코메티, 그의 기다란 조각들을 보고 있자면 사람 속에 웅크리고 있는 본성적인 고독, 그 인생의 허무함에 사로잡혀 기댈 곳도 없고 바람막이도 없이 허허벌판에 나 혼자 선 느낌이 들곤 했다.
카쉬가 찍은 자코메티의 이 사진을 보는 순간, 아~ 자코메티의 작품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 그러나 말로 표현하기 좀 힘든 그 느낌과 감정을 카쉬는 어쩜 저렇게 그의 표정 속에서 잡아내어 사진에 담았는지 감탄스러웠다.
▲어니스트 허밍웨이(Ernest Hemingway), 1957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등을 지은 대문호를 찍으러 가는 카쉬는 얼마나 떨렸을까? 카쉬가 만난 헤밍웨이는 아주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 사진은 카쉬의 다른 인물사진과 뚜렷한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사진들이 숙고하는 모습, 손을 많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이는 데에 비하여 헤밍웨이의 사진은 오히려 지나칠 만큼 단순하게 보이는 구도이다. 카쉬는 헤밍웨이에게서 바깥 세상을 향하고 있는 절묘한 힘의 균형을 찾으려 했다고 한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1945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세계 4대 건축가의 한 명으로 역사에 길이 남은 그는 누구보다도 드라마틱한 삶을 산 사람이다. 카쉬가 찍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여유롭고 자연스러운 그의 오만이 몸과 표정에 배어 있다. 웃음 속에 담긴 강한 그의 개성, 옆으로 약간 기울인 자세와 한 손에 들고 있는 담배의 연기 때문에 그의 자연스러운 파워를 더 잘 느낄 수 있게 된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General Dwight Eisenhower), 1946
아이젠하워 장군의 눈빛과 시선에서, 다문 입과 코를 타고 흐르는 팔자 주름에서 인류에 대한 그의 강한 신념과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카쉬는 후에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된 후에 다시 그의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943
영국 최고의 극작가인 조지 버나드 쇼. 그의 박학다식을 따를 사람이 있었을까? 그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는 너무 많아서 소개할 수도 없다. 너무 똑똑하고, 너무 아는 게 많은 지식인 중의 지식인인 버나드 쇼를 만나 사진을 찍을 때 버나드쇼의 나이가 90이었다는데도 카쉬는 젊은이의 에너지를 느꼈다고 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유머와 위트로 이어지는 그의 앞에서 카쉬는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노인이어서 노련하면서도 슬쩍 오만함의 분위기가 전체를 감싸고 있는 모습을 어떻게 찍을까 고민하던 카쉬가 순간을 포착해낸 것이 이 사진이다. 나는 이 사진을 보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레이스 켈리(Grace Kelly), 1956
그레이스 캘리, 당시 마린리먼로와 함께 여배우의 양대 산맥이었던 그레이스 캘리는 섹시 어필의 먼로와는 반대로 아름답고 도도하고 우아한 귀족의 이미지메이킹의 대명사로 불리는 여배우였다.
그녀는 필라델피아 명문가에서 태어나 요조숙녀, 여왕의 이미지메이킹에 성공하여 아카데미 영화상까지 수상하였고 드디어 영화의 히로인이 현실에서도 히로인이 되는 일이 벌어졌다. 모나코의 왕비가 되어 우아하기 이를 데 없는 영화 같은 삶을 살다가 간 아름다운 여인. 카쉬의 사진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흰색 배경으로 찍은 그녀의 사진이 너무 아름답다.
▲헬렌 켈러와 폴리 톰슨(Helen Keller with Polly Thompson), 1948
눈이 보이지 않는 그녀와 마주한 카쉬, 그러나 그녀의 눈을 보면서 이야기를 하게 되는 이상한 경험. 세 살부터 눈도 안 보이고, 귀도 안 들리는 헬렌 켈러를 만났을 때 놀라울 만큼 감각적인 손가락으로 카쉬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헬렌 켈러에 대한 감동을 카쉬는 잊을 수 없다고 한다.
헬렌 켈러의 절친한 동료인 폴리 톰슨과 함께 찍은 이 사진 속에는 도저히 불행이 엄습하지 못할 부드러운 카리스마와 인생을 관조하는 여유로움이 충만하다고 할까?
▲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 1988
오타와를 방문한 테레사 수녀를 만나 사진촬영을 요청했으나 처음에는 거절당했다. 그러나 이 촬영이 봉사활동에 도움이 될 거라고 설득을 거듭하여 찍게 된 이 한 컷, 검은 배경에 돋보이는 흰 수녀복과 우측의 정면광을 사용하여 더욱 신비로운 성녀의 이미지를 부각시킨 작품이다.
테레사 수녀의 고귀한 삶, 자신을 전혀 돌보지 않은 희생과 사람들을 감싸 안는 어머니의 모습이 주름진 얼굴에 담겨 있다.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 1954
파블로 카잘스, 세계적인 첼로 연주자인 그를 만나기 위해 먼지 나는 길을 운전하여 가면서 순례자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카쉬. 어둡고 조용한 방에서 첼로를 연주하는 카잘스의 모습을 본 카쉬는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사진 찍는 걸 잠시 잊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 번도 등을 돌린 인물사진을 찍은 적이 없는 카쉬가 선택한 구도는 연주 중인 카잘스의 뒷모습을 찍는 것이었다. 감옥의 창을 연상케하는 벽의 높은 곳에 있는 창문을 통하여 빛이 들어오듯이 바로 그 창을 통하여 늙은 예술가의 음악이 세계로 울려 퍼지는 느낌을 담고 싶었던 것. 이 사진을 보고 있자니 정말 카잘스의 선율이 온몸을 휘감는 것 같은 감동이 밀려왔다.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954
파블로 피카소, 캔버스와 작품으로 쌓여있는 당대 최고 거장의 저택에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카쉬에게는 악몽 같은 경험이었다고 한다. 사진을 찍으려고 움직일 때마다 발에 걸리는 물건들, 그리고 그 스튜디오 안을 뛰어나니는 어린아이들. 그래서 다시 잡은 약속이 피카소의 도자기 미술관에서의 촬영.
이 사진을 찍을 때 약속을 어기기 일쑤인 피카소는 정확한 시간에 새 셔츠를 사 입고 나타나서 카메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며 스스로 완벽한 구도를 잡았다고 한다. 빛을 이용해 그의 강한 인상을 부각했고, 늘 여자가 끊이지 않았던 피카소답게 여자의 나신이 그려져 있는 도자기 옆에서 사진을 찍었다.
[ 글=권은경. SG디자인그룹대표.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