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앞에서] 모두가 슈미트주의자

2024.08.14 06:00:00 13면

 

주권자는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다(„Souverän ist, wer über den Ausnahmezustand entscheidet.“). 나치스의 계관 법학자 칼 슈미트(Carl Schmitt)의 말이다.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에 대한 해석론을 배경으로 나온 말이지만, 지난 한 세기 헌법학을 넘어 다양한 분야에서 소비되다 보니, 이제는 아무나 갖다 쓰며 아무 말이나 하는데, 이 글도 그런 글 중 하나다.

 

주권자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라면, 주권자가 되고 싶은 주권자 지망생들이나 주권자 호소인들도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가 되고 싶을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예외상태라고, 예외상태에 필요한 예외적인 조치를 도입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싶을 것이다.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위한 특별조치안’, 일명 “25만 원 지원법”에 대한 재의요구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25만 원 지원법”은 법률의 전형과는 거리가 멀다. 헌법에 반하는 처분적 법률이고, 권력분립의 원리를 해한다는 비판이 있다. 처분적 법률이 불가피한 상황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처분적 법률이 예외가 아닌 정상이라고 할 수도 없다. 민주당은, 지금이 민생회복을 위한 예외적인 조치가 필요한 ‘예외상태’인데, 정부가 이를 방기하고 있으니, 우리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로 나서겠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닌가.

 

“25만 원 지원법”도 거부권이 행사될 것이다. 대통령은 이미 양곡관리법, 간호법, 방송법, 50억 클럽 특검법, 도이치모터스 특검법, 이태원 참사 특별법, 채상병 특검법, 방송법 등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민주화 이후 헌정사에서 거부권의 행사는 ‘정상’보다는 ‘예외’였다. 노무현 정부가 4번, 이명박 정부가 1번, 박근혜 정부가 2번 행사했을 뿐이다. 헌법전에 적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거부권은 행사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는 관례가 있었다고 기억한다. 대통령은 지금이 거부권 행사라는 특단의 조치를 연거푸 감행해서라도 저지해야 하는 입법부 폭주의 ‘예외상태’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슈미트는 입법부와 행정부, 의회와 대통령의 대립 구도를 전제하면서, 대통령이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로서 적극적으로 결단해야 할 것을 암시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이든 히틀러 총통이든 누구든 그 역할을 수행해, 끊임없이 토론만 하고 아무것도 결단하지 못하는 의회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문했다는 것이다.

 

슈미트의 눈에 비친 바이마르는 토론만 하고 아무것도 결단하지 못하는 무력한 공화국이었다. 오늘날 우리 공화국은 이편이나 저편이나 토론은 내던지고 앞다투어 예외상태를 선언하며 결단하느라 바쁘다. 다들 슈미트주의자고 다들 결단주의자다. 토론을 한 기억도 없는데 토론은 끝났다고 저쪽 이야기 더 들을 필요 없다고 이제는 결단뿐이라고 예외적 조치의 총동원이 불가피하다고 선언한다. 주권자는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다. 진정한 주권자는 예외상태가 아닐 때는 예외상태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는 자가 아닌가.

김상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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