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진화] 노동을 잃은 노동자

2025.10.20 06:00:00 13면

 

노동이 삶의 중심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일하는 방식으로 정체성을 만들고, 사회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노동 없는 노동자’라는 새로운 존재와 마주하고 있다. 일할 능력도, 의지도 있지만 노동할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 실업은 단지 소득의 부재가 아니라, 사회적 소속의 상실을 의미한다.

 

20세기 후반, 특히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대량 실업은 경기 침체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실업은 더 구조적인 차원을 갖는다. 자동화, 디지털화, 아웃소싱은 일자리를 줄이고, 정규직 중심의 고용은 점차 사라진다. 더 많은 사람이 일할 수 있지만, 더 적은 수의 일만이 존재하는 기이한 역설.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자신을 사회로부터 고립된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노동은 경제적 행위 이전에 사회적 관계다. 일터는 단지 임금을 벌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타인과 연결되고 존재를 인정받는 공간이다. 실업이 사람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이유는 경제적 곤궁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쓸모없다’는 낙인을 내면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는 곧 자존감의 파괴이며, 삶의 동력을 잃는 계기가 된다.

 

더욱이 오늘날의 실업은 단지 ‘노는 사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구직을 강요받는 ‘준노동자’ 상태로 이어진다. 이들은 일하지 않으면서도 노동시장의 문턱에 머무르며, 자격을 갖추기 위해 비용과 시간을 소비한다. 실업은 휴식이 아니라, 끝없는 자기 증명의 시간으로 변질되었다. 이는 비단 경제적 실패가 아니라, 문화적・심리적 소외의 상태이기도 하다.

 

이런 구조 속에서 일부는 ‘플랫폼 노동’이나 ‘프리랜서’라는 이름으로 대체 노동을 수행하지만, 이는 고용의 대안이 아니라 고립의 심화일 수 있다. 일은 있지만, 소속은 없다. 플랫폼은 사람을 연결하지 않고, 오히려 고립된 개인을 경쟁시키는 체제로 기능한다. 연결되어 있으나 단절된, ‘네트워크 속의 고독한 노동자’가 바로 오늘날의 자화상이다.

 

노동 없는 노동자라는 말은 단순한 역설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노동의 본질을 다시 물어야 한다는 요청이다. 단지 고용 여부를 넘어, 인간이 의미를 갖는 삶을 위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를 성찰해야 한다. 실업의 문제는 고용의 숫자가 아니라, 소외의 구조에 있다. 일할 수 없음은 곧 존재의 소멸로 이어진다. 우리는 노동이 아닌 인간을 중심에 놓는 새로운 구조를 상상해야 한다. 노동 없는 노동자가 아니라, 소외 없는 인간을 위하여.

 

노동의 의미는 곧 ‘기여’로 충족된다. 자신이 하는 행위가 억지나 생존의 의무가 아니라,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하며 속한 커뮤니티의 발전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명백히 기여이다. 고용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노동이 부정되는 사회는, 기여의 가치를 판단하지 못하는 사회다. 기여 중심의 시각에서 보면, 돌봄, 창작, 자원봉사, 지역 활동 등 수많은 비임금 노동들이 모두 중요한 생산이며 존재의 확인이다. 노동은 계약 이전에 기여이고, 기여는 인간됨의 증명이다.

 

우리는 이제 노동의 유무가 아닌 기여의 질로 존재를 평가해야 한다. 한 사회가 진정으로 건강하다는 것은, 기여를 발견하고 존중하는 감수성을 갖추었는가에 달려 있다. 고용이 불가능한 시대에조차 기여는 가능하다.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의미를 창출하며, 공동체에 힘을 보탤 수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새로운 노동 윤리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이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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