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뉴욕 방문길에 브로드웨이 극장에서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를 보게 되었다. 이 공연은 우리나라 오디컴퍼니 신춘수 대표가 아시아인 최초로 뮤지컬 본고장인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리드 프로듀서를 맡아 기획부터 제작까지 주도한 작품이다. 2024년 3월에 브로드웨이를 시작으로, 올해 4월엔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그리고 지난 8월엔 서울에서도 공연하였다.
겨울밤 찬 공기에 비도 내렸는데, 공연을 보러 온 인파로 극장 안은 오히려 훈훈할 정도였다. 나처럼 여행 중에 극장을 찾은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근무를 마친 직장인들을 비롯해 크리스마스 시즌에 벼르고 뮤지컬을 보러 온 현지인들이 대부분인 듯했다. 멋지게 차려입고 칵테일 한 잔씩 들고 극장 안으로 들어오는 상기된 표정들이 그렇게 보였다. 공연이 끝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주인공 제이 개츠비 역을 맡은 국민 배우 제레미 조던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아낌없는 박수 소리를 들으며, ‘위대한 개츠비’가 미국민들에게 주는 감흥은 남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동명 소설 ‘위대한 개츠비’가 출간된 건 1925년이다. 당시 미국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산업 생산국이 되어 호황을 누렸지만, 과소비와 부채, 금융 거품 등으로 1930년대의 대공항의 전조가 보이기도 한 때였다. 그때 유행했던 재즈, 스윙 음악은 아메리칸드림의 빛과 그림자를 대비해 주는 듯하다.
내용은 이렇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여인 데이지를 떠나야 했던 개츠비는 오직 그녀를 다시 만나겠다는 신념으로 엄청난 부를 일구고, 웅장한 저택을 마련하고, 화려한 파티를 열었다. 다시 만나게 된 데이지는 개츠비와 다시 사랑을 이루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불륜과 계급 갈등, 거짓과 위선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남편을 따라 떠나고 만다. 결국 개츠비는 오해와 사고로 총을 맞고 죽음에 이른다. 이런 주인공 개츠비를 미국인들은 위대하다고 부른다.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의 무대 색상은 초록이다. 그 빛은 강 건너 데이지의 집 선착장 불빛으로, 그 빛이 초록이다. 초록빛은 시간 너머의 꿈, 손에 닿지 않는 희망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러나 개츠비에게는 사랑의 꿈을 지키는 순수함과 결코 평범하지 않은 ‘비범한 희망 능력’이 있었다. 물질 만연주의의 피폐함과 출신 배경으로 인한 차별이 현실이었던 그 시대에 이런 개츠비의 모습은 빛났으리라. 외로움과 절망 중에도 희망을 찾고 지키고자 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관객이 그때의 개츠비를 위대하다고 부르는 이유이리라.
소설 ‘위대한 개츠비’는 미국 고등학교 교과 커리큘럼에서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지도하고 있다. 이 소설이 타임 선정 20세기 영문학 100선에 들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다음 세대도 희망의 미국을 위해 무엇을 알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우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어느덧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세밑 온정과 같은 따뜻한 소식을 듣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치권에서는 엉켜 있는 실타래처럼 어둡고 무거운 소식들만 들려온다. 내년 지방선거도 소급하여 긴장감을 놓지 않으려 한다. 이런 현실에 국민들에게 희망을 보게 하는 그런 정치인들을 떠올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당장 ‘위대한 정치인 누구’라고 불러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