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숙의 프랑스 문학 살롱] 반나폴레옹의 중심지 스탈부인의 살롱

2026.01.19 13:56:58 16면

 

계몽주의 시대 그리고 혁명기 프랑스에서 문학 살롱을 운영했던 살로니에르(살롱 여주인) 중 가장 현대적이고 혁신적인 여인은 아마도 제르멘 드 스탈(Germaine de Staël) 부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프랑스 문학과 정치사에 중요한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특히 그녀의 살롱은 나폴레옹에 대한 강력한 정치적 저항의 중심지였으며, 당대 주요 문학 및 정치 인사들의 만남의 장소였다.

 

1766년 4월 17일 파리에서 태어난 스탈부인의 본명은 안 루이즈 제르멘 네케르(Anne-Louise-Germaine Necker). 그녀의 부모는 수잔과 자크 네케르로 파리에서 명성이 높았다. 아버지는 제네바 출신의 개신교 은행가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어머니는 개방적인 여성으로 파리 상류 사회에 깊이 관여하면서 대담하고 파격적이며 비판적인 사고로 살롱을 운영했다.

 

네케르 부부는 어린 제르멘에게 칼빈주의 신앙을 가르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동시에 관용과 세상에 대한 개방성을 바탕으로 한 교육도 제공했다. 제르멘은 계몽주의의 진보성과 종교적 도덕성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 환경에서 자랐다. 열다섯의 소녀 시절 그녀는 벌써 루소와 몽테스키외를 읽었고, 당대의 문학과 철학 사건에 큰 호기심을 보였다.

 

 

1776년 자크 네케르가 루이 16세의 재무부 장관으로 발탁되자 제르멘의 집에는 장관, 외교관 등, 정치 엘리트가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이는 어린 소녀에게 권력의 내부 작동 방식을 목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됐고 한편으로는 지적인 자극제로 작용했다.

 

스무 살 때 그녀는 개신교 신자이자 스웨덴 국왕의 프랑스 궁정 대사였던 스탈 홀슈타인 남작과 결혼했다. 이들의 결혼은 사랑에 기반 하기보다 정치적 결합이었지만 이 덕분에 그녀는 국제적이고 세련된 계몽 귀족 사회에 합류했고 외교관 루이 드 나르본과 작가 벤자민 콩스탕을 비롯한 여러 인물과 교류하게 됐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스탈 부인은 혁명에 열광하며 제헌의회의 평등주의적이고 해방적인 이상을 지지했다. 그러나 1793년부터 프랑스 혁명이 공포정치로 이어지고 반대 세력을 단두대에 처형하자 그녀는 혁명에서 등을 돌렸다. 스탈 부인은 잠시 영국으로 망명한 후 스위스의 코페로 돌아가 가족 저택을 차지했다. 이때 그녀는 지식인들과 함께 ‘코페 그룹’을 형성했다. 그녀의 살롱에는 당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영국에서 가장 재능 있는 작가들이 모여 제국주의 또는 절대주의 체제에 반대하는 활동을 펼쳤다. 이 놀랍도록 진보적인 그녀의 살롱에는 레카미에 부인, 대문호 샤토브리앙, 프로스페르 드 바랑트, 그리고 영국의 바이런이 찾아와 개혁적인 사상을 논의했다.

 

1795년 5월 파리로 돌아온 그녀는 어머니의 살롱을 본뜬 문학 및 철학 살롱을 열었다. 아버지 네케르 장관처럼 자유분방한 감성을 지닌 그녀는 콩도르세와 같은 18세기 철학계의 거장들을 초대했고, 무엇보다도 독립 선언 이후 정치적 자유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신생 미국의 영웅 라파예트와 같은 인사를 초청했다. 후에 탈레랑과 같은 입헌 군주제를 옹호하는 개혁가들도 찾아왔다.

 

스탈 부인의 살롱은 곧 파리 상류 사회의 전형이 되었으며, 귀족적인 예의범절과 표현의 자유가 공존하는 활발한 사교 활동의 장이 되었다. 이곳에서는 거의 모든 주제가 자유롭게 논의되었고, 진정한 정치적 반대 의견이 싹트는 토대가 되었다.

 

나폴레옹이 부상하자 스탈 부인은 그와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6년 넘게 지속된 내전을 종식하고 혁명을 완성한다는 명분으로 권위주의 체제를 추진했다. 스탈 부인은 이러한 정책을 호전적이고 폭력적이며 오직 지도자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여겨 강력히 반대했다.

 

이후 그녀의 삶은 나폴레옹과 투쟁의 연속이었다. 나폴레옹은 그녀가 쓴 책 한 권 한 권이 자신을 공격하고 있다고 여겨 그녀를 파리에서, 그리고 결국 프랑스 전체에서 추방했다. 황제에게 맞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이 여성은 자유분방하고 매우 강인했다.

 

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스탈 부인은 보나파르트에게 “장군님,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여성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보나파르트는 “가장 많은 아이를 낳은 여성입니다, 부인!”이라고 대답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앙숙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그녀에 대해 “나에게는 네 명의 적이 있다. 프로이센, 러시아, 영국, 그리고 스탈 부인이다”라고 말했다.

 

 

나폴레옹은 영향력 있는 여성을 싫어했고, 스탈 부인의 내면을 차지하고 있는 강한 자유와 독립심을 정확하게 간파했다. 실제로 스탈 부인은 1802년 파리의 살롱으로 돌아와 반나폴레옹 운동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뛰어난 지성과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드나들던 파리 7구 살름(Salm) 호텔에 있는 그녀의 살롱은 나폴레옹과 그의 1804년 쿠데타 시도에 가장 강력하게 반대했던 인물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이곳은 의견과 아이디어를 교환하는 장소로 세대와 국적, 종교, 정치적 견해가 서로 다른 지식인들을 한데 모았다. 자유, 개인과 그 권리, 타인에 대한 존중, 법 앞의 평등이라는 가치로 똘똘 뭉친 이들은 저술 활동과 유럽 여행을 통해 자신들의 사상을 전파했다.

 

스탈 부인은 정치적 입장, 대담성,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권위에 맞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해방된 여성이었다. 또한 그녀의 살롱은 당대를 대표하는 여류작가 조르주 상드와 마리 다굴 같은 인물에게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막대한 부를 축적한 그녀는 매우 관대했으며,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재산 덕분에 혜택을 받았다. 그녀는 문학을 논하면서 노예제 폐지, 여성의 지위 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이혼, 여성의 행복권, 표현의 자유, 그리고 노예제 폐지를 위해 투쟁에 앞장섬으로써 행동하는 시민이었다.

 

제국이 멸망하고 3년이 지나 그녀는 고국 프랑스로 돌아왔지만 1817년 쉰한 살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강인한 성품을 지닌 스탈 부인은 18세기 후반 가장 뛰어난 지성을 지닌 인물 중 한 명으로 샤토브리앙과 함께 낭만주의 운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벤자민 콩스탕과 알렉시 드 토크빌처럼, 스탈 부인 역시 프랑스 혁명, 정치적 자유주의, 그리고 권위주의 정권의 폐해에 대해 예리한 분석을 했으며 이와 같은 그녀의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정치 이론의 초석이 되고 있다.

최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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