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삶이 끝나갈 때까지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

2026.01.19 16:30:22 16면

척의 일생–감독 마이크 플래너건

 

2020년에 발간된 스티븐 킹의 중단편집 ‘피가 흐르는 곳에, If it bleeds’의 모든 작품은 영화로 만들어졌다. 현재 한국 극장가의 구석, 곧 예술영화 전용관에서 거의 종영을 기다리고 있는 ‘척의 일생’도 이 중단편집에 두 번째로 실려 있는 원작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스티븐 킹의 소설답게 다소 기이한 공포의 감성도 섞여 있는데 예컨대 척의 할아버지 앨비(마크 해밀. 맞다. ‘스타워즈’의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 역의 그 마크 해밀이다)가 어린 손자인 척(벤자민 파자크)에게 절대로 올라가면 안 된다는 지붕의 골방과 같은 존재가 그렇다. 인자한 할아버지가 절대 금기시하는 그 방에는 뭔가 비밀이 숨겨져 있다. 실제로 할아버지 앨비는 이 방문을 연 손자를 계단으로 밀쳐 낸 후 방 안의 ‘어떤 모습’을 보고 경악한다.

 

미스터리는 스티븐 킹의 장기이자 일종의 낙관 같은 것이다. 없어서는 안 될 그의 소설 속 요소이다. 그러나 그것은 작품 전체의 주제를 밀고 나가는 하나의 소도구이자 맥거핀(MacGuffin: 눈속임 장치)일 뿐이다. 그의 작품에는 그보다 더 심오한, 인생과 세상에 대한 철학이 담겨 있다. 감독인 마이크 플래너건 역시 지금까지 ‘오큘러스’나 ‘힐 하우스의 유령’ 같은 공포 영화 혹은 시즌 드라마를 만들어 왔다. 플래너건이야말로 스티븐 킹의 원작을 작품의 훼손 없이, 그러나 자기식의 해석을 곁들여 잘 만들어 낼 수 있는 기능공 같은 감독이다. 이번 ‘척의 일생’은 플래너건이 스티븐 킹의 적자임을 증명해 낸 작품과 같다.

 

 

영화는 소설처럼 총 3막으로 구성돼 있되 특이하게도 역순으로 흘러간다. 처음의 3막은 ‘고마워요, 척’이고 2막은 ‘버스커는 영원하다’이다. 마지막 1막은 ‘나는 수많은 것을 담고 있다’이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서로 다른 이야기, 다른 사람의 관점을 담고 있는 듯 느껴진다. 특히 3막의 ‘고마워요, 척’은 지구 종말의 이야기가 주된 줄거리이다. 여기에 잠깐 스치듯 척이 병상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비춘다. 세상의 멸망은 마치 이 에피소드가 보여주는 일들처럼 진행될 것이라는 점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을 오싹하게 만든다. (스티븐 킹이 그려내는 공포는 물리적이고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이렇게 심리적인 데에 있다) 캘리포니아 거의 전체가 지각 변동으로 가라앉으며 사라지고 네바다로 난민이 대거 유입되지만, 인터넷도 끊기고 방송도 없어지며 속수무책이 된다. 3막의 주인공 마티 앤더슨(추이텔 에지오포)이 직장인 학교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서다 만난 이웃집 남자 거스(매튜 릴라드. 1996년 공포 영화 ‘스크림’의 살인자 역 배우이다)는 그에게 절망스러운 푸념을 늘어놓는다. 거스는 집에 오는 도로에 엄청난 싱크홀이 생겨 차를 버리고 5km 넘게 걸어 온 참이다.

 

“캘리포니아의 나머지 20%도 완전히 없어졌대. 중서부는 (가뭄 때문에) 숯덩이고 플로리다는 홍수래. 식량 생산지역이 없어졌어. 아시아는 기근에 흑사병이고 러시아 정부는 전복됐대. 파키스탄하고 인도가 4일간 전쟁을 벌였고 독일에서는 화산이 폭발했어. 세상에 독일에 화산이 있었어?”

 

마티 앤더슨과 거스가 한탄하는 것은 멸망과 멸종의 순간을 그저 넋 놓고 앉아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무력감 때문이다. 마티는 ‘그 순간’이 바로 코앞에 다가설 때 헐레벌떡 자신의 전 부인인 펠리시아(카렌 길런)를 찾는다. 그런데 이 얘기와 척의 일생은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2막과 1막으로 서서히 실체가 드러난다. 실제로 척의 중년기(톰 히들스턴)와 소년기(벤자민 파자크)의 얘기가 그려지기 때문이다. 중년기의 척, 곧 찰스 크랜츠는 어느 날 회계사들을 위한 컨퍼런스에 왔다가 길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는 테일러(테일러 고든)의 드럼 비트에 맞춰 충동적으로 춤을 춘다. 척은 연애 10개월 만에 남자에게 차인 여자 재니스(애널리스 배소)를 길 중앙으로 리드하며 한바탕 길거리 무대를 ‘찢어 놓는다’. 척의 춤 실력은 초등학생 때의 춤 동호회 ‘트월러와 스피너’에서 갈고 닦은 것이지만 사실은 할머니인 사라(미아 세라)에게서 온 DNA이다.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곧 태어날 여동생 모두를 교통사고로 잃은 척은 조부모의 손에 의해 길러지고 할아버지처럼 회계사가 돼 자신을 지극히 사랑하는 아내 지니(코리안카 킬처)와 행복한 삶을 이어 가지만 뇌종양으로 3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곧 죽어 갈 운명이 된다.

 

소년 척이 다니는 과거의 학교는 현재의 마티 앤더슨 교사가 근무하는 곳이다. 척이 복도를 지나갈 때 교실에 앉아 있는 사람이 마티 교사이다. 그는 소년 척이 자기 자신보다 30cm가 큰 소녀 캣 맥코이(트리니티 조리 블러스)와 댄스 경연 대회의 분위기를 역시 ‘찢어 놓을 때’ 그걸 지켜보기도 한다. 마티와 펠리시아 전 부부가 지구 멸망 전 올려다보는 하늘은 소년 척이 쳐다본, 별이 가득한 하늘과 같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인물들은 별도로 존재하는 듯, 상대의 존재를 초월적 감각으로 인식한다. 17살이 된 청소년 척(제이콥 트렘블레이)은 할아버지의 장례를 맡은 장의사 샘 야보로(칼 럼블리)에게 예언자에 관한 얘기를 듣는다. 이 야보로는 3막에서 주인공 마티 앤더슨이 길거리에서 만나는 그 장의사이다. 인간의 삶은 어쩌면 운명처럼 예정돼 있다는 것이 이 장의사의 얘기이다.

 

 

이쯤 되면 3막에서 그려진 세상의 멸망과 2막, 1막으로 ‘뒤집혀서’ 이어지는 척의 일생이 어떤 내용으로 연결되고 있는지가 떠올려진다. 그 의미도 드러난다. 우주는 인간이고 인간은 우주이다. 우주의 멸망은 인간 모두의 죽음이지만 척과 같은 한 인간의 죽음 역시 우주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3막에서 주인공 마티는 ‘고마워요, 척!’이라는 수많은 입간판, 광고 빌보드, 꺼져 가는 TV의 마지막 광고가 쏟아지는 것을 보고 의아해한다. 찰스 크랜츠는 도대체 누구인가. 왜 그에게 39년간의 노고에 고맙다고 하는가. 그는 주변에 묻고 또 묻는다. 할아버지마저 돌아간 후 17살이 된 척은 절대로 열지 말라던 지붕의 방을 연다. 그리고 거기서 누워 죽어가는 자신인 중년의 척, 39살의 척을 본다. 그리고 3막에서 마티의 전 부인인 펠리시아가 병원에서 들었던(그녀는 간호사이다) 심장 모니터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린다. 17살 척은 자신의 마지막을 목격한다. 척은 중얼거린다. “없었던 것처럼 (못 봤던 것처럼) 살 거야. 삶이 끝날 때까지 내 삶을 살아갈 거야. 나는 경이로운 존재야. 난 수많은 것을 품고 있어.”

 

영화 ‘척의 일생’은 우주와 나는 하나라는, 우주의 근원은 나 자신의 실존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삶을 사랑하고 지탱해 나가는 노력이 우주 자체를 살리는 작은 실천과도 같다는 점을 얘기하는 작품이다. 스티븐 킹과 그를 흠모하는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점점 동양의 사상과 철학에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의 철학인 셈이다. ‘척의 일생’은 미국의 배급사 중 새로운 강자인 네온(‘기생충’ 배급)의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크리스마스 대목을 겨냥해 개봉됐지만 1월 19일 현재까지 관객 25,989(영화진흥위원회 박스오피스 집계 기준)명을 모으는 데에 그쳤다. 수작은 종종 외면받는다. 안타까운 일이다.

오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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