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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은 경건한 마음으로 역사 밝히는 것”

[문화리더를 만나다]조유전 경기문화재연구원장·남한산성위원장

 

“발굴은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왜 그랬는지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가 실체를 밝힐 수 있는 것 입니다. 유물을 통해 증명할 수 있는 것 입니다.”

지난 3월 경기문화재연구원장 겸 남한산성위원장에 부임한 조유전(67) 원장.

한국 고고학의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는 조 원장은 지난 3월 발굴 기관으로 복귀 신고식을 치뤘다.

그는 부임 후 약 3개월간 개발에 따른 구제발굴위주의 유적발굴을 학술발굴이 가능하도록 기틀을 마련하고 있다.

조 원장은 남한산성운영위원장 겸 경기문화재연구원장에 부임 한 후 2달 여 간의 성과에 대해 “남한산성의 경우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이 조직을 갖추고 나서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로 구역이 나누어져 있어 도의회에서 남한산성관리규정이 마련됐다. 통합운영이 필요함으로써 그 기틀이 마련하게 됐다”고 밝혔다.

또 경기문화재연구원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대부분 개발에 따른 구제발굴위주의 유적발굴을 학술발굴이 가능하도록 기틀을 마련한 성과가 있다”고 말했다.

올해 개원 10주년을 맞은 경기문화재연구원은 구석기~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경기지역 30만년 역사를 정리하는 ‘경기발굴 10년의 발자취’ 특별전을 열고 있다.

특별전에는 큰 의미가 있다.

“경기도박물관이 지금까지 추구한 것은 고고미술적인 측면에서 테마별 전시를 해 왔기 때문에 경기의 전 역사를 아우르는 전시가 없었죠. 말하자면 통사(通史)적으로 꽤 뚫어보는 전시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번 전시는 경기도민 뿐 아니라 전시를 보러오는 모든 사람에게 유구한 역사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자부하고 있어요.”

올해 처음으로 남한산성운영위원회가 신설됐다.

조 원장은 운영위원회의 역할에 대해 “남한산성은 광주시, 성남시, 하남시의 관할이 나누어져 있어 이를 하나로 묶어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것”이라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한산성을 치욕의 역사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단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호국의 성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40여년간 발굴을 통해 그는 ‘한국 고고학의 증인’ 이라 불리고 있다.

1971년 문화재관리국 직원을 시작으로 발굴을 하면서 재미있던 일화도 많다.

“재미있는 일화라기보다는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어요. 1971년 11월28일 저녁 갑자기 밀어닥친 한파는 세상을 꽁꽁 얼어붙게 했었죠. 그때 우리는 지금의 서울 암사동 선사시대 주거지를 발굴하고 있었는데 움집터의 조사를 마치고 집의 기둥자리를 확인하지 못한 채 최종적으로 조사를 끝내고 다음날 정리된 집자리의 촬영을 마치고 철수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날 오후 6시경 갑자기 영하 10도 이하로 기온이 떨어지고 초속 15미터이상의 광풍이 몰아쳐 인수봉을 등산하고 자일을 타고 내려오던 등산객이 7명이 서로 엉켜 죽는 참사가 일어난 거죠. 다음날 조사를 마친 주거지의 바닥이 1cm가량 얼어 있어 이를 들어 낸 결과 못 찾았던 기둥자리와 함께 신석기시대의 토기인 빗살무늬토기가 완전한 상태로 발견됐습니다. 갑자기 밀어닥친 한파는 7명의 젊은 인명을 앗아갔지만 암사동 주거지를 발굴하고 있었던 우리에게는 토기와 기둥자리를 선물한 결과가 됐어요. 지금도 그때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고학을 전공한 조 원장은 방화로 소실된 국보 1호 숭례문에 대해서도 유감스러움을 나타냈다. 소실된 지 1년이 넘었지만 그의 마음은 아직도 아프고 믿기지 않을 뿐이다.

“2008년 2월10일은 ‘문화재국치일’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우리민족의 상징으로 여겨온 국보 1호가 그것도 무례한의 계획적인 방화에 의해 소실되었다는 것은 더욱 마음을 슬프게 합니다. 숭례문 화재는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이지만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왜 국민의 성금을 모아 복원하지 않는가에 있습니다. 나라의 상징이 비록 불탔지만 이를 복구하는데 국민의 한 사람 한사람의 성금을 모아 다시 복원한다면 의미 있는 일이 되었을 텐데요.”

“4천만이던 5천만이던 우리는 비록 태워 죄를 지었지만 복원에는 모두가 참여했다고 기록된다면 먼 훗날 우리의 후손들은 그래도 선조들은 양심이 있었다고 생각하겠죠. 복원이 완성된 후 성금을 낸 사람의 이름을 돌판에 새겨 영구히 보존한다면 이것이 바로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물은 현대 사회와 고대 사회의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한다. 현대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유물들이 나오면 연구에 가속도가 붙고 열정이 생긴다. 비록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유물도 그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역사의 가치다.

“발굴조사를 통해 수습되는 유물은 비록 파편이라 할지라도 의미가 있고 그것이 이 땅에서 처음 발견되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과거 우리조상들은 모든 것을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손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개념으로 같은 제품의 대량생산은 불가능했고 모두가 하나 하나 손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같은 것은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1971년 공주에서 발견된 백제무령왕릉의 지석(誌石)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말하자면 여기 누워있는 주인공은 무령왕과 왕비임을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 백제의 역사를 다시 쓰게 됐습니다.”

그는 남한산성운영위원회와 경기문화재연구원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남한산성은 문화유산보존과 활용 중심으로 나아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도록 노력해 나갈 것이다”라며 “경기문화재연구원은 학술발굴조사를 통해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고학을 배우는 후배들에게도 선배로써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고고학은 땅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농사는 농부가 지어야 하는 이치와 같이 고고학적 발굴은 전문훈련을 받지 않고 발굴한다면 이것은 바로 도굴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정신을 가다듬어야 해요. 발굴이 잘못되면 골동품 수집에 지나지 않고 학술적인 가치는 없어지게 되요. 그렇기 때문에 인내를 가지고 경건한 마음으로 그리고 내 손으로 몰랐던 과거의 역사를 밝힌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발굴에 종사해야 합니다.”

 

약력

개발따른 구제발굴서 학술위주 기틀 마련
‘10년의 발자취’ 특별전 경기역사 한눈에

 

   

 

▲학력
1966년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 졸업(학사)
1980년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석사)
1987년 동아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박사)

 

▲이력
1982 ~ 1990 경주고적발굴조사단장
1987 ~ 1989 문화재관리국 미술공예실장, 유적조사연구실장
1982 ~ 1993 완도청해진 유적발굴조사단장
1994 ~ 1998 국립민속박물관 관장
1998 ~ 2002 국립문화재연구소장
1999 ~ 2006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위원
2006 ~ 2007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관장
2008 ~ 現 경기문화재연구원장 겸 남한산성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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