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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리더를 만나다] 이원재 우리소리 상임이사

대학교 풍물패 동아리 활동 시작 사물놀이에 빠져
인간문화재 양순용 선생 밑에서 3년 공부 후 데뷔
내부갈등·금전문제 등 우여곡절 속 우리소리 창단

 


우리국악 편하고 즐기수 있게 대중화 노력


 

“우리문화, 특히 국악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과의 격차가 있다. 좀더 편하고 쉬게 다가갈수 있는 단체로 만들어 모든 이들과 공유하는 것이 꿈이다.”

지난 2000년 2월14일 창립돼 같은해 8월14일 사단법인 인가를 받은 우리소리.

 

그 가운데서 초창기부터 현재까지 핵심역할을 하고 있는 이원재 선생(44·우리소리 상임이사)을 만났다.

사단법인 전통예술원 우리소리는 1995년 10월20일 창단된 풍물촌·꼭두를 모태로 사단법인 전통예술원 우리소리는 순수 민간인들과 전통문화와 함께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 그리고 우리 것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젊은 일꾼들이 모여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를 발굴·계승 발전시키며 문화에 목말라 있는 시민들에게 널리 보급해 새로운 문화 창조에 노력하는 단체다.

우리소리 근처 커피숍에서 만난 이원재 선생은 사무실 내에서 상임이사로 불리고는 있지만 옆집 아저씨 처럼 거추장 스러운 것을 싫어 했다.

이 선생은 “우리의 소리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데 직급은 중요하지 않아요. 또 편하고 쉽게 우리 문화를 이해하게끔 하는 사람으로서 그 무엇도 중요치 않죠”라며 입을 열었다.

그가 우리소리라는 풍물패를 만들기까지는 수많은 악재와 우연이 겹치게된 그야말로 필연이었다.

“처음 풍물을 접한 것은 수원대학교 풍물패 동아리 시절이었죠. 그리고 이곳이야 말로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1987년 군대에 가기 전 동아리에서 전라북도 임실군 강진면 필봉리를 방문하면서 부터예요. 군대가기 며칠 전 방문한 그곳에서 이제 것 볼 수 없었던 대보름굿을 보게 됐죠. 점심부터 굿을 하다가 그 다음날 아침까지 모닥불을 켜 놓고 사물놀이에 흠뻑 빠져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요. 그야말로 문화적 충격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죠.”

이원재 선생은 그 당시의 기억을 가지고 제대를 하자마자 필봉리에 있던 양순용 선생께 무작정 찾아가게 된다.

“필봉농악, 농악이라는 것이 각지역의 명칭을 대분분 따르게 되거든요. 그때 필봉농악을 만나게 됐죠. 그리고 그 곳에서 인간문화재(제11-마호) 상쇠에 양순용 선생님을 뵈었죠. 양순용 선생님 밑에서 있으면서 처음 3개월동안은 제일 많이 했던 일들이 나무 캐오고 밥하고 걸레질하고…, 그러면서 어깨너머로 배워 오던 중에 선생님이 ‘이제 가르쳐 주겠다’라는 말을 하셨죠. 그 당시 그 말씀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필봉농악은 전라도에서는 다른말로 ‘좌도굿’이라고도 한다. 이후 그는 양순용 선생 밑에서 3년동안 ‘좌도굿’을 배우게 되고 1990년 6월 전주 우석대에서 양 선생의 아들과 함께 정식으로 데뷔하게 된다.

순간 이원재 선생은 왜 전라도에서 수원까지 와서 ‘우리소리’를 창단하게 됐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선생님과 떨어지게 되면서 그 지역에서 좋지 않은 일이 발생했고 그때서야 ‘이제 내가 떠날 때가 됐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리고 나서 쉬고 있는데 수원에 사는 후배 다섯 놈이 전화를 해서 사물놀이패를 만드려는데 도와달라고 요청해서 그냥 오게됐어요.”

“당시 세류동 수원농협 지하를 빌리게 됐는데 완전히 창고였어요. 치우는데 돈이 필요해서 여기저기 급전을 모으게 됐죠.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꼬박 3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어요. 돈 있을 때면 보수공사를 했고 돈이 없을때 저희가 직접해서 시간이 많이 걸리게 됐죠.”

그런데 그가 후배를 도와주면서 후배들 사이에서 갈등이 있었고, 이원재 선생은 그들을 내보낼 수 밖에 없었다.

“한 가족 안에서 후배 둘이 싸우게 됐고 나가라고 했죠. 그리고 6개월 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허무하기도 했고…. 그래서 마음 속에서 지나친 오기가 생기게 된거예요. ‘이건 꼭 해야겠다, 꼭 해야한다’라고요. 그리고 우연일지는 모르지만 6개월이 지나고 제가 가르쳤던 한 후배한테 전화가 왔고 저와 함께 한 배를 타게 됐죠.”

이후 이원재 선생은 1996년 ‘화성백중제’를 기획·제작하게 된다.

백중은 뙤약볕아래 밭매기와 논매기 등 바쁜 농사일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농부들이 잠시 허리를 펴고 풍년을 기원하는 시기로 음력 7월15일인 백중을 기념해 농부들이 노동의 고통과 지루함을 해소하기 위해 벌였던 신명나는 놀이판을 수원화성에서 재현하는 것. 하지만 이들은 처음부터 순탄한 길을 걸을 수 없었다.

“화성백중제를 하기전 부터 일은 벌어졌죠. 지인 한분이 1억이라는 돈을 투자한다고 해서 했는데, 막상 여기저기 섭외를 다 한 상태에서 도와주지 않았죠. 그 당시 장사익 선배 등을 초청했는데 차비도 제대로 손에 쥐어주지 못하고 보내드렸죠. 이 상태로는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극단 꼭두’를 만들게 됐고 2000년도에 들어서 ‘우리소리’를 만들게 됐죠.”

“특히 당시에 중요하게 드는 생각이 국악이 갖는 문화적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예요. 원래 국악이라는 것이 보는 사람과 행하는 사람이 즐겁게 놀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제 꿈도 사람들에게 국악이 편하고 그리고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문화환경조성이죠.”

그는 현재 경희대에서 예술경영을 배우고 있고 이제 4학기가 끝난 상태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는 국악에 대한 열정과 갈망이 엿보였다.

“우리소리, 우리문화가 현재 대중들과 좀 거리가 있는 듯 해요. 국악이 재밌는데 안보셔서 모르시는 거겠죠. 그래서 많은 접촉이 필요해요.”

“제 꿈이 문화환경 조성이라고 했잖아요. 저는 국악을 전공으로 하는 국악장학재단과 국악전통극장을 만들고 싶어요. 저도 그렇고 제 부인도 그렇고 국악을 하면서 참 금전적으로 많이 힘들었죠. 그래서 생각한 것이 국악장학재단이예요.”

그럼 그가 꿈꾸는 국악전통극장은 무엇일까.

“왜 사람들이 연극을 보려면 대학로로 갈까요? 그곳에는 연극이라는 것이 매일 이뤄지는 곳이기 때문이죠. 언제든지 공연을 보고 싶으면 대학로로 가면되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70~80좌석의 소극장도 괜찮아요. 수원의 국악전통극장에서는 국악소리가 매일 울리고, 국악을 보고 싶으면 수원으로 오면 되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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