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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리더] 마가미술관·대전시립미술관 송번수 관장

유아시절 어머니 여의고 그림에 의존
초·중·고교 각종 공모전서 상 휩쓸어
파리유학 태피스트리 보고 인생전환점

미술관, 세계최고 예술 콘텐츠 만들것

 

6살때 기와집 그림으로 여기저기서 칭찬을 받고 미술계에 발을 들여 놓은, 현재는 용인 마가미술관과 대전시립미술관 관장으로 재임중인 송번수(63) 관장을 만났다.

청조한 가을하늘 아래 그가 주말마다 머물고 있는 ‘마가미술관’에서 그와 그의 도구들, 그리고 그에게서만 나는 특별한 향수를 찾았다.

“제가 네 살 되던 1946년 봄 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이듬해 국내의 매우 열악한 의료 환경 속에서 어머니는 동생을 분만하다 산후열이라는 병명으로 어린 나를 남기고 세상을 등지셨죠. 이러한 상황에서 어린 나이에 고독을 느끼면서 무엇인가에 의존해야 했고, 그 의존 대상이 그림이었습니다.”

그는 그림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이후 초·중·고등학교 과정에서 각종 공모전에서 상을 받게 되면서 그의 관심은 한층 고무돼 일관된 미술의 길로 이어지게 된다.

“중학교 때 이미 미술대 진학을 결정했죠. 하지만 제가 어릴 때 가장 좋은 직업이 은행가였고, 그래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미술에 대한 꿈을 버릴 수가 없어서 혼자 미술공부를 지속적으로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미술대학에 입학하던 1961년 한국사회의 모든 면은 너무나 열악했어요. 그 상황 속에서의 미술대학 진학은 일종의 모험이었죠. 그 당시 일반대중에게 디자인이라는 말 자체가 전혀 익숙해 있지 않은, 그야말로 예술 불모의 세상 분위기에서 미술을 생의 진로로 선택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사나이에게는 대단한 예술의 집념과 자아의식이 없이는 불가한 일이었습니다.”

송 관장은 이러한 사회분위기 때문에 미대생들의 학구열은 사력을 다하는 노력과 열의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고 회상한다.

이후 대학교에서 판화를 공부, 송 관장은 1976년 파리 유학생활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친구를 따라 파리 미술관에 들렀는데 그 곳에서 ‘타피스트리’를 보고 ‘한번 해볼만 하다’는 생각을 시작하게 됐죠.”

 

그가 타피스트리 작업을 해온지 40여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송 관장은 지난 1980년대 초 국내 최초로 태피스트리를 도입, 작품 주제를 자연친화적으로 접근하고 표현기법을 다변화하는 등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여왔다.

이러한 실험정신으로 그는 1972년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와 2001년 헝가리 개국 1천년 기념 국제 태피스트리 비엔날레, 2002년 국제태피스트리 비엔날레 등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국제적인 태피스트리 작가로 우뚝 섰다.

특히 송 관장은 2006년 9월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의 무대막을 복원하는 등 현재까지 왕성한 작품활동을 펼치고 있다.

타피스트리는 실로 짜여진 회화를 일컫는 말로 씨실(Weft)과 날실(Warp)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색실로 회화를 한올 한올 짜아나간 고도의 감각과 기술이 어우러진 섬유예술작품이다.

유럽 최초의 타피스트리 곱틱 타피스트리(기원전 5세기붙커 6세기 말)는 이집트의 크리스찬들이 사용했던 장식용으로서 성서의 내용이 담겨있고 종교적 성격이 강하므로 성서와 역사서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송 관장은 타피스트리를 통해 이라크 전쟁의 비극, 기아, 공해 등의 메시지를 전달, 역사의 진실을 알리고 모순점을 고발하는 것이 예술가가 감당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고 작업에 임하고 있었다.

현재 그는 지난 1986년 용인시 모현면 동림리에 마련한 작업실을 지속적으로 자신의 손으로 하나하나 터전을 가꾸어 1994년 미술관으로 증축, ‘마가미술관’을 만든 당사자이다.

사립미술관을 운영하느라 안 그래도 무거운 어깨가 최근 들어서는 더욱 무거워졌다.

지난 5월14일자로 대전시립미술관을 이끌 새로운 수장으로 임명됐기 때문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은 대전에서, 토·일요일은 용인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난생 처음 해보는 행정업무가 쉽지만은 않았다.

“출퇴근을 하는 입장이지만 이곳 마가미술관은 고향과 같은 곳이지요. 지금은 대전과 용인을 오가면서 전시 환경을 정비하는데 힘을 보탤 수 있어 다행으로 느껴지기만 합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와도 작업에 손을 댈 시간은 조금도 생기지 않는다. 작업보다도 마가미술관 관리가 시급하기 때문. 아내가 돌보고 있지만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다.

“이 마가미술관은 내가 살아생전에 만든 걸작 중에 하나이다. 처음엔 너무 작아서 성경 ‘마가의 다락방’에서 힌트를 얻어 이름을 지었다”며 “내가 말띠라 말의 집(馬家)이란 뜻도 있다”고 덧붙였다.

마가미술관에는 송 관장의 판화와 타피스트리(다채로운 선염색사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의 기법) 작품이 이번달 말부터 전시할 예정으로 그는 인터뷰 중에도 전시걱정이 앞서있었다.

인터뷰가 끝난 직후에도 지난 10월 31일 끝난 기획전으로 인해 미술관 곳곳을 자기 손으로 직접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려운 못질도, 망치질도 그에게는 쉬워 보였다. 특히나 높은 곳을 올라가기 위해서 트레인 까지 개인적으로 샀으니 이 미술관에 대한 애정은 그만큼 특별했다.

미술관을 운영해 온지 10여년이 지났지만 그가 정식으로 ‘마가미술관’이 미술관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것은 지난 2002년부터였다.

“우리나라의 법에서 학예사(큐레이터)가 상주해야 정식미술관으로 등록할 수 있죠. 2002년도 당시 마침 미술사를 전공하는 딸이 학예사 자격증을 취득해 그제야 미술관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죠.”

사실상 사비로 운영하는 사립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는 학예사를 고용하는 데 어려움이 많이 따르기 때문에 ‘마가미술관’이 정상적인 미술관으로 환영받지는 못했었다.

“사립박물관이나 미술관의 경우 관람료로 운영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더불이 마가미술관은 대부분 무료로 관람객들에게 문을 개방하고 있어요. 특히나 복권기금이나 경기문화재단에 행사계획서를 제출해서 선정됐을 때 받는 지원금 외에는 지원이 전무하죠”

그는 그렇기 때문에 사립박물관이나 미술관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일종의 애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현재 그는 한 시립미술관의, 사립미술관의 관장이지만 그가 가진 화가의 꿈은 버리지 않는다.

“이제 바랄 꿈이랄 건 없습니다. 다만 내가 나이가 더 먹기 전에 한 작품이라도 더 만들어 내가 화가라는 본분을 잊지 않는 것. 그것으로만 살고 생을 마감하는 것이 꿈이지요. 이 몸이 쇄한다 하더라도 화가의 신분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더불어 대전시립미술관과 마가미술관을 세계 수준의 예술 컨텐츠로 만들고 싶습니다.”

약      력
1965년 홍익대 공예과졸
1974년 同산업미술대학원졸
1977년 프랑스 파리국립미술학교졸 
1970년 경기공전 조교수
1978년 홍익공전 조교수
1980년 홍익대 미대 섬유미술학과 교수
1982년 현대미술 초대전
1983∼1985년 현대미술초대전·발파라이소 비엔날레·국제판화 비엔날레·한국현대성화전
1985년 현대미술 초대전
1986년 서울아시아현대미술전·국제임팩트전·류브리아나국제판화 비엔날레
1992년 근작판화 초대전
1994년 타피스트리전
1996년 마가미술관 관장(현)
2003∼2008년 홍익대 미대 섬유미술·패션디자인과 교수
2008년 한국사립미술관협회 이사
2009년 대전시립미술관 관장(현)
▲저서
‘섬유예술’, ‘염색의 실제’, 현대섬유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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