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과 기억의 결합 내면세계 투영”
지난 5일 용인 기흥구 마북동 작업실에서 우리나라의 고유 종이인 한지를 사용해 국제적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학국화학과 송수련 교수(65)를 만났다.
상가 건물에 위치한 작업실에는 송수련 교수가 사용하고 있는 한지에서부터 먹, 붓 등 한 작품을 사용하기 위한 도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조용한 작업실 한 켠에는 송수련 교수의 작품들이 보였다. 부드러운 색감의 작품들과 꼴라주로 입힌 도자기들이 시선을 빼앗았다.
송수년 교수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기쁨이 충만하던 날 아침 서울에서 태어났다.
“동대문구 신설동의 할아버지 댁에서 컸어요. 넓은 뜰이 있는 2층 양옥집이었는데, 할아버지가 은행 지점장을 지내셨기 때문에 당시로써는 좋은 집이었죠. 그리고 그 집을 담쟁이덩굴일 온통 덮고 있었어요. 요즘 제가 사는 상도동 집에 담쟁이덩굴을 올리려 애를 쓰는데, 어느 날 그게 내 어릴 적의 풍경을 되살리고 싶다는 소망의 표현이란 걸 알았죠.”
송수련 교수와 그림과의 만남은 초등학교 3학년 때 부터였다.
“동신초등학교 3학년 때, 친구와 함께 사생대회에 나갔어요. 풍경화를 그리는 실기대회였지요. 보문사라는 절에서 대회가 열렸는데, 나중에 서양화를 전공하게 된 친구는 상을 받고, 나는 받지 못했어요. 그때 나뭇잎을 묘사하려고 애쓰던 기억이 있어요. 미제 크레용을 썼는데 이상하게 내가 원하는 생이 나오질 않는 거예요. 그래서 속이 탔죠. 이게 그림과 제가 연관된 최초의 기억이죠.”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작품에는 다른 그림에 없는 색을 쉽게 찾을 수가 있다. 빨간색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고 남들이 찾지 못하는 색을 찾기 위해 몇 날 몇 일을 그녀는 고군분투 하고 있다.
중학교 시절에는 창덕여중에 들어가게 되면서 그림에 대한 욕구를 강하게 느끼게 된다. 도쿄 유학시절 송수련 교수의 아버지는 하숙집 여주인으로 부터 코발트블루 바탕에 화분에 꽃이 있는 그림을 하숙집 여주인이 주게 됐고, 거기서 강렬한 인상이 남았던 아버지는 딸 셋에게 모두 그림을 배우게 했다.
“제가 맏이고 두 여동생이 있는데 바로 아래 동생은 조소를, 막내는 서양화를 전공하게 됐죠. 막내는 지금도 현역화가로서 작업을 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치고 있죠. 여하튼 중학교때 감수성이 아주 예민하던 시절에 타인과의 대화보다 자연이라는 거대한 대상과의 교감에 치중하느라 말수가 적은 내성적인 사람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도 낯을 많이 가리고 자연 속에 있는 것을 더 좋아하지요”
이후 그녀는 우리나라의 전통 한국화에 입문하게 된다. 일랑 이종상 선생 밑에서 그림을 배우게 된 송수련 교수는 “처음 다니게 된 화실에서 이종상 선생을 만나 한국화에 대한 기초를 탄탄히 하게 됐다. 이종상 선생의 작업실이 가까운 동네에 있다는 단순한 이유였지만 우연인지 어머니와 항렬까지 같은 광주 이가(家)였지요”라고 말했다.
이후 일랑 이종상 선생은 그녀에게 동양화 사군자를 그려보면 어떻겠냐고 권유하게 됐고, 이후 송수련 교수는 한국화에 빠지게 됐다.
“이종상 선생님은 조선의 마지막 화원이셨던 이당 김은호 선생님의 수제자이셨기에 전통회화에 관한 한 제가 최고의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는 행운을 누린 것이죠. 이런 인연으로 선생님께서 작업하시는 과정을 목격하기도 했는데 밑그림을 그린 뒤 다시 본 작업을 하는 과정을 세심하게 배웠지요. 그때 선생님의 작업이 한복을 입은 세 명의 단아한 여인을 멋진 선으로 표현한 것이었는데 나중에 그림을 미술관에서 보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현재 송수련 교수의 작업을 엿보면 송 교수가 사용하는 제목과 단어가 가장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70년대 중반부터 사용하고 있는 ‘관조(觀照)’와 ‘내적시선’이라는 단어는 송 교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관조라는 작품세계를 말하시는 것 같은데요. 그 제목은 창덕여고에서 국어를 가르치신 김소영 선생님을 통해 얻은 것이죠. 시인이신데 어눌한 말투지만 재미있는 선생님이셨어요. 어느 날 수업시간에 그 분의 말씀을 들으며 관조라는 개념이 자릴 잡게 됐죠. 저는 그래서 지난 30여 년간 예술에 대한 작가로서의 제 태도와 지향점을 밝히기 위해 작품에다 ‘관조’라는 제호를 붙여 왔습니다. 그것은 풀이하자면 자아의 바깥에 위치한 대상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저 자신의 ‘내적 시선’이자 동시에 그 시선을 통해 저 개인의 명상과 삶의 흔적을 포함하는 보다 보편적인 존재의 기억들이 응축되는 지점을 일컫는 말입니다.”
송수련 교수의 그림은 언제나 자연에 대한 관찰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하지만 그 관찰은 현존하는 자연에만 머무는 것은 아닌, 자신의 안에서 숨 쉬고 있는 많은 타인들,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포함하는 무수한 사람들까지 포함된 채 송교수 자신에게 투영되고 있다. 그리고 관찰의 집적물인 자연이 추상적이며 모호하긴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하나의 정서로 나타나게 된다.
“제 작품은 ‘물질과 기억’의 결합으로서의 그 정서를 화포 위에 풀어내는 것이 제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제 작업은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표현은 아닙니다. 외적 세계의 빛과 대상이 ‘발’을 거치며 변환돼 안으로 투과되듯 무의식의 기억을 통하여 내면 세계에 간접적으로 투영된 이미지를 그리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물을 그리는 순간에도 저는 그 사물 자체보다는 그것이 환기시키는 정서를 포착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생각하는 예술에서의 추상 활동입니다.”
그래서인지 송수련 교수의 작업은 그린다기보다 지운다는 역설적 방법이 사용된다.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지워진 흔적으로서의 자리만이 떠오른다. 화면엔 무언가 구체적인 대상이 잡히지 않고 구체적인 존재가 지나간 흔적만이 가까스로 남아있는 것이다.
“마치 향기가 어떤 시간과 공간이 결합된 ‘생의 순간’을 되살려내듯이, 저는 제 이미지들이 그것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의 안에 파묻혀 있는 우주와 세계와 역사의 한 자락을 보게 만들고, 누적된 시간의 지층 속에서 생의 진실의 한 조각을 주워들 수 있게 하기를 꿈꿉니다. 구체적인 형상을 분명하게 드러냄으로써 가시적 세계에 얽매이기보다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존재의 진실이 자리할 수 있는 공간, 즉 ‘현존’이라는 직접성의 억압을 벗어 던짐으로써 오히려 비가시적인 것을 포함한 다양한 생이 살아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까 송수련 교수가 가고 있는 길은 어떠한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그것을 통해 자연을 엿보는 자신과의 대화가, 소통이 일상화가 돼버렸다.
더욱이 송수련 교수가 가진 꿈은 교수 나이를 다시 젊게 만들 수밖에 없다.
“제가 가진 꿈은 앞으로 미지의 세계로의 나아가는 것이지요. 현실적인 관점에서의 미지의 세계란 한국이 아닌 미지의 다른나라에 가서 활동영역을 넓혀 한국 고유의 한지를 알리고 그 우수성을 세계인에게 각인시켜 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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