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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리더] 바리톤 우주호

계층 벽 허무는 공유하는 음악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이죠

 

클래식 문화가 귀족화됐지만 특정 계층의 소유물은 절대 아니며 클래식은 계층 간의 다리가 돼야 한다. 이를 위해 농촌이나 저소득층처럼 문화의 사각지대에 있는 분들에게 클래식 문화를 접할 기회가 더 많아져야 한다. 그는 봉사활동으로 클래식 음악으로부터 소외된 계층을 찾아가 노래를 들려준다. 자신이 지닌 재능을 활용해 베푸는 방식이다.

“음악을 통한 사회적 역할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음악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경북의 어느 한 교회에서 성가대 활동을 하던 ‘우주호’라는 소년은 대학시절 남들이 다 하는 유학 한번을 해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세계 정상까지 끌어 올렸다.

그리고 그는 현재 지속적이고 진정성 있는 실질적 사회 환원과 지역 문화 예술 발전을 위해 수원 삼호아트센터 예술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바리톤 우주호는 독특한 이름만큼이나 음색의 깊이가 크고 넓다. 그가 부르는 가곡은 청중의 심금을 금방 울린다.

그가 지닌 뛰어난 가사 전달력과 함께 구성진 음색은 청중을 금세 사로잡는다. 우주호는 그동안 ‘베르디’의 곡을 가장 잘 구현하고 표현력이 뛰어난 성악가로 정평이 나있다.

그는 국내외에서 오페라만 30편을 300회 가까이 공연했다. 자신의 목소리를 세계정상에서 국한되지 않은채 나날이 발전시키려고 노력하는 그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만났다.

바리톤 우주호 씨는 어렸을때 다니던 교회와 그의 친형의 말한마디에 성악가가 되기를 꿈꿨다고 한다.

“고향에서 성가대 활동하면서 그저 찬양하는 것이 좋아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던 중 저의 재능을 발견한 성가대 지휘자가 성악가의 길을 권유하게 됐죠. 이후 저는 막연히 성악가의 꿈을 꾸게 됐습니다. 그리고 저에겐 형님이 한분 계신데, 어렸을 때 형님이 저에게 ‘남자가 노래를 잘하면 모든 일에 대해서 리더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죠. 어렸을 때지만 아직도 형님이 말씀하셨던게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그 뒤 우주호 씨는 포항에서 대구까지 하루 3시간이 걸리는 통학거리를 오가며 작고한 성악가 문학봉 선생에게서 본격적인 성악을 배우게 된다.

아버지의 잇따른 사업실패로 돈까지 빌려 멀리 성악을 배우러 가는 소년의 마음은 무거웠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을 같직한채 자신의 길을 독하게 걸어갔다.

“그날들을 잊을 수가 없어요. 형편이 좋지 않던 대에 어머니는 돈을 꾸어 차비와 레슨비를 하라고 3만5천원을 손에 쥐어줬어요. 대구까지 레슨을 받으러 가면 선생님은 포항에서 올라온 저를 위해 레슨시간을 비워 둘 만큼 정말 열정적으로 가르쳐주셨어요. 늘 그 사랑을 생각하면 제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이후 하늘이 내려준 고운 음색을 지닌 그는 정식으로 성악을 배운지 불과 3개월만에 목소리가 바뀌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레슨 6개월 만에 첫 콩쿠르를 나가게 되고 2등을 하게 된다. 이후 대학 등이 주최하는 전국 고등학생 대상 콩쿠르에서 무려 8회나 우승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우게 된다.

그는 콩쿠르의 경험을 통해 이후 당시 유일하게 오페라학과가 있던 한양대학에도 4년 전액 장학생 자격으로 입학하게 되고 나라에서 주는 음악 특기생 자격을 따게 된다. 이후 졸업을 하고 나서 그는 서울 시립합창단에 70대1이란 경쟁률을 뚫고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부터 바리톤 우주호의 진면목이 들어나게 된다.

“처음 서울시립오페라단에 다니면서 신고식을 치루게 됐죠. 신고식이란 것이 무대의 단역을 맡는 것이었는데 그때부터 당시 감독님 눈에 들어서 점차 많은 역활을 소화하게 됐습니다. 이후 큰 역할을 맡으면서 긴장감이 사라지고 관객들과의 호흡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아갔죠”

그리고 대학교와 서울시립오페라단에서 활동하는 우주호씨를 눈여겨본 세계적인 오페라 연출가인 쥬세페 줄리아노의 추천으로 이탈리아로 유학해 이태리 로렌쪼 빼로지 국립음악원, 키지아나 시립아카데미아, 빠르마 극장 아르뚜로 토스키니니 아카데미아 등을 졸업하게된다.

특히 유학중 유수의 콩쿠르에서 1등으로 입상하며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프란체스코 칠레아 국제 성악 콩쿠르 1위, 이태리 타란토 국제성악콩쿠르 1위 에 입상했다.

그리고 수차례 콩쿠르에서 우승한 그는 로마국립극장에서 ‘라 트라비아타’와 ‘팔리앗치’로 데뷔 무대를 갖고 이어 이태리 국영방송에도 출연하게 된다.

이어 그는 세계적인 성악가 로란도 니꼴로지, 카티아 리치아렐리, 가스디아 등과 함께 활동을 하면서 이목을 끌었다.

그리고 로마시 주최의 연주회에서는 세계적인 대가 뻬에로 카푸칠리를 대신해 무대에 서는 등 그는 세계적인 성악가들에 견주어 가는 커리어를 쌓아가게 됐다.

하지만 이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치매를 얻게돼 한국으로 귀국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바리톤으로 꼽히고 있다.

한국으로 돌아온 우주호 씨는 지난해 가곡집 ‘사모곡’ 음반을 제작했다. 음반 수익금의 일부는 치매노인들을 위해 지원하고 있다.

그는 “한국 가곡의 위대함을 국외로 떨쳐보는 게 개인적인 바람”이라면서 “한국 가곡의 세계화를 위해서 세계 곳곳에서 가곡 독창회를 많이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성악가로 유명하다. 그는 “음악이 갖고 있는 사회적역활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 뿐”이라며 “보여주기 식이라는 말을 들을까봐 망설이기도 했지만 이것이 나의 기쁨이고 보람찬 일이다”고 덧붙였다.

그는 봉사활동으로 클래식 음악으로부터 소외된 계층을 찾아가 노래를 들려준다. 자신이 지닌 재능을 활용해 베푸는 방식인 것.

더불어 그는 유명해지고 사회적으로 능력이 됐을 때 봉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늘 갖고 ‘우주호와 음악친구들(WMF)‘을 결성하면서 그의 소망은 이루어지게 됐다.

마지막으로 바리톤 우주호 씨는 “클래식 문화가 귀족화됐지만 특정 계층의 소유물은 절대 아니며 클래식은 계층 간의 다리가 돼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 농촌이나 저소득층처럼 문화의 사각지대에 있는 분들에게 클래식 문화를 접할 기회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약 력

▶한양대 음악대학 성악과 졸업

▶이태리 로랜쪼 빼로지 국립음악원 성악과 졸업

▶이태리 국립 산타 체칠리아 아카데미아 성악과졸업

▶이태리 로마 베니아미노 질리 문화상 수상

▶국제 콩쿨 5회 우승 및 수회 입상

▶국내외 오페라 및 콘서트 500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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