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화가 배 남 경
“판화는 내가 만들어낸 이미지와 만들어내지 않은 추상적인 이미지가 섞여 있기 때문에 영원하고 무한한 현상들을 담아낼 수 있는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삶이 의도치 않게 흘러가듯이, 의도하지 않게 찍힌 이미지들을 통해 삶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면에 형상을 그려 판을 만든 뒤 잉크나 물감 등을 칠해 인쇄하는 판화는 복제의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술적인 면에서 높게 평가받지 못하는 장르 중 하나다.
서양화를 전공하고, 현재는 판화 작업을 하고 있는 배남경 작가는 판화를 통해 충분히 예술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붓이 아닌 판에 찍어내는 간접적인 방식을 통해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이미지를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작품은 회화처럼 정교한 표현 뿐 아니라 흐릿하고 모호한 표현이 어우러져 환영(illusion)적인 이미지로 완성됐다.
배남경 작가는 “환영적인 이미지와 판화 자체에 있는 결의 이미지가 섞여 있는 것이 내 그림의 특징이다. 회화로 했다면 특별하지 않을 수 있는 이러한 이미지들은 본래의 이야기를 풍요롭게 하는 요소다”라고 설명했다.
배남경 작가가 판화를 시작한 계기는 작가로서의 권태로움에서 비롯됐다.
배 작가는 “대부분의 작가들은 그림이 어떻게 완성될지 알고 그리기 시작한다. 이러한 회화의 작업방식이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때 눈에 들어온 것이 판화였다”라며 “판화는 내 생각이 10%라면 생각지 못한 이미지가 나올 확률이 90%다. 이러한 간접성과 우연성이 나에게는 흥미로운 요소로 작용했다”라고 전했다.
특히 배남경 작가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인 환영적인 이미지는 판화 작업에 회화적인 특성을 도입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그는 “작업을 할 때 단일한 판을 가지고 이미지를 소거하면서 수차례 제판하고, 하나의 종이에 10회에서 많게는 70회 이상 인쇄를 덧입힌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수십 단계의 물감층이 형성, 물리적인 공간감이 더해져 살아있는 그림으로 완성된다”고 설명했다.
수십 겹의 물감층이 덧입혀져 완성된 배 작가의 작품은 시간의 축적을 통해 완성되는 삶의 모습과 닮아있다. 이처럼 그의 작품에서는 우리 삶의 단면을 발견할 수 있다.
배남경 작가는 “‘바라보고 그리고 깎고 찍는’ 과정은 결국 몰두해서 생각하는 것이고, 이는 곧 삶의 본질을 찾는 과정이다”라며 “나와 가장 가까운 일상의 풍경을 담은 작품을 통해 대중들과 친근하게 소통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배남경 작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외곽의 지층들’ 전시는 오는 20일까지 수원 해움미술관에서 이어진다.
/민경화기자 mk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