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가다

2012.01.04 18:48:23 24면

한·중 우호 새로운 이정표 자리매김

중국 충칭(重慶·중경)시에 가면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가 있다. 그러나 이곳 임시정부청사는 그동안 상하이(上海)의 그늘에 가려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가정집들의 얼기설기한 빨래줄 사이로 마주본 임시정부청사의 모습은 애잔한 마음이 먼저 스며 들었다. 18년 동안 260명이 다녀갔을 뿐이다.

청사에는 빛바랜 태극기가 교차해서 걸려 있는 1층 회의실과 2층 김구 선생의 집무실, 좁디좁은 통로와 화장실, 부엌이 딸린 3층 구조였다. 이 좁은 건물 안에서 100명 이상이 운신했다는 사실은 믿기 힘들 정도다.

청사 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관계자는 “임시정부 자리가 재개발 대상 중 하나로 고려됐지만, 한국 정부와 중국 정부의 긴밀한 협조로 재개발 대상에서 제외됐다”고 말했다. 중국 속 항일 유적의 발자취로 존재하고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를 찾았다.<편집자 주>

 

 

▲충칭 임시정부 청사의 모습

고층 아파트와 주택 건물들 사이로 충칭 임시정부청사가 있다.

중·일 전쟁과 일본의 계속되는 탄압, 거기에다 독립운동 노선에 대한 임시정부 내부갈등까지, 이로 인해 임시정부는 중국 각처로 옮겨 다니게 되고 결국 충칭에 마지막 둥지를 틀게 된다.

충칭의 임시정부청사는 상하이 청사보다 15배나 큰 규모였다.

벽을 사이에 두고 대통령 집무실과 외교통상부, 그 옆방에는 재정경제부가 있는 형태 등 조직적으로 분권된 구조다.

하지만 중국 스촨성 지진의 영향으로 곳곳에 금이 간 충칭 임시정부청사의 모습은 유명 인사들의 방문과 기업들의 후원 간판이 걸려 있는 상하이 청사의 모습과 달리 쓸쓸해 보였다.

충칭 청사 가경해 관장은 “상하이에 비해 많이 알려져 있지 않고, 교통편 또한 용이하지 않아 사람들의 발걸음과 관심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김도형 독립기념관 연구원은 “충칭 임시정부의 경우 광복군 창설을 포함한 모든 독립운동을 받아들여 통합적으로 국민들의 독립운동을 통제했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광복군을 창설, 국내로 진격해 독립전쟁을 벌이려 했던 충칭 청사.

그러나 1945년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한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우리 광복군이 준비한 독립 전쟁은 무산됐다.

▲청사의 복원과 의의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로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이를 피해서 항주·가흥·진강·장사·광주·유주·기강 등지를 거쳐 1940년 충칭에 도착했다.

충칭에 도착한 임시정부는 대한 민국의 정식 군대인 한국광복군을 창설했고,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도 버어마 전선에 참가하는 등 조국 광복을 위해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충칭 청사는 임시정부가 양류가·석판가·오사야항 등으로 옮겨 다니다 광복을 맞이한 마지막 청사로 1992년 충칭시 정부의 승인을 받아 시급 문물보호단위 65-38호로 지정됐고, 광복 50주년을 맞이한 지난 1995년에 복원됐다.

당시 복원공사는 중국 충칭시 인민정부외사판공실과 문화국의 협조로 한국독립기념관에서 추진했으며, 현대중공업, LG그룹, 고합그룹, 대림산업, 대한항공 등의 기업에서 협찬했다.

이후 충칭의 고온다습한 기후로 인해 부분적으로 훼손된 청사를 지난 2000년 개·보수했다.

2층에 임시정부 군사활동전시실을 신설하고 같은 해 9월17일 광복군 창설 60주년을 맞아 재개관식을 가졌다.

망국의 설움을 딛고 오로지 조국광복을 휘해 헌신한 애국선열들의 넋을 기리고 한·중 우호의 새로운 이정표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이동

3·1운동 이후 보다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독립운동의 전개를 위해 노령·상하이·서울 등지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한 민족지도자들은 단일정부로 통합되기를 바라는 민족적 열망에 따라 상하이에 통합임시정부를 세웠다.

민족의 대표기구이자 독립운동의 중추기구로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내정, 군사, 재정 등 각 방면에 걸쳐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교육, 언론 홍보활동 등으로 민족의식을 외쳤다.

또한 적극적으로 외교활동을 전개하며 전세계에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윤봉길 의사 등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탄압으로 임시정부는 결국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杭州), 자싱(嘉興), 창사(長沙), 광저우(廣州), 류저우(柳州) 등 중국 관내지역을 이전하며 재기를 모색했다. 그리고 1940년 충칭에 정착하면서 본격적으로 흐트러진 전열을 재정비하고 항일독립운동에 전념했다.

▲충칭시기의 대한민국임시정부

1940년 9월 충칭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는 한편 전쟁수행과 광복 이후 조국의 재건에 대비하기 위한 체제정비에 착수했다.

임시정부는 1941년 11월28일 삼균주의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제정, 공포하고 1942년 10월 제34차 임시의정원 의회에서 각 정당 단체를 망라한 통합의회를 구성했다.

전 민족적인 전시대책과 헌법개정논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 결과 1944년 제36차 임시의정원 의회에서 각 정당을 망라한 연합정부를 구성하고 조국독립에 대비한 헌법을 마련, 이는 곧 광복 이후 대한민국 헌법의 기초가 됐다.

한편 임시정부는 태평양전쟁 발발이후 종래의 청원외교의 방식을 참전외교의 방식으로 바꿔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국제적인 승인을 받기 위한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이 때문에 카이로회담과 포츠담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임시정부의 군사활동

임시정부 초기에는 군대를 수립할 만한 객관적인 여건이 성숙되지 못했기 때문에 각 지역을 중심으로 특성에 맞는 다양한 군사정책을 택했다.

그러다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후, 임시정부는 중국과 협의해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의 한인특별반을 설치·운영하면서 무장항일투쟁을 주도적으로 전개해 나갈 인재를 양성했다.

충칭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1940년 9월17일 구한말의 의병과 중국 동삼성에서 활동한 독립군의 전통을 이어 받아 임시정부의 직할무장부대인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1942년 조선의용대를 편입, 3개 지대와 특파단·공작대 등을 편성하고 조국이 광복하는 그날까지 항일투쟁을 주도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하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할 것을 밝혔다.

인도와 미얀마 전선에까지 공작대를 파견하고, 그들은 정보수집, 선전활동 등에 주력하며 중국군, 영국군, 미군 등과 연합작전을 수행했다. 또한 1944년에는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합작해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했다.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임시정부 요인과 광복군은 이국에서의 기나긴 투쟁을 마감했다.

◆ 충칭(重慶)시는?

장강(長江·양자강)과 가릉강(嘉陵江)이 합류하는 곳에 위치한 충칭은 원래 사천성에 속했다.

지난 1997년 충칭직할시로 승격하면서 인구 3천200만명의 세계 최대도시가 됐다.

중국의 4번째 직할시이기도 하다.

춘추전국시대부터 양자강을 이용한 수상교역의 중심지로 현재는 공업도시로 발전했다.

충칭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는 1940년부터 해방 직후인 1945년까지 있던 곳이다.

충칭 임시정부청사 내부에서 당시 임시정부 요인들의 활동을 담은 사진과 유물들을 볼 수 있다.

 

이동현 기자 leedh@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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