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균의 재미있는 인천 2-괭이부리, 만석부두

2020.10.06 09:25:48 15면

 

괭이부리, 만석부두

 

 인천의 초기 역사라면 거의가 비류왕(沸流王)의 도읍지였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하지 않나 싶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에 의하면 동명왕(東明王)의 두 왕자 비류와 온조가 남하하여 비류는 미추홀(인천의 옛 이름), 온조는 위례성(경기 남양주)에 자리 잡았다고 했다. 미추홀 땅은 물이 짜고 습해 번성치 못하여 몰락하고 온조계에 흡수되었다는 간단한 역사의 한 토막을 가지고 인천의 역사를 다 안다 함은 어불성설이 아닐까.

 

과연 인천은 못 살 땅이었나. 백제는 비류계와 온조계의 연합 왕국이었고 뒤에 온조계가 승리함으로써 비류왕 미추홀 왜곡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더더욱 침략의 발판을 놓던 일본의 초기 왜곡을 합친다면 쓰라린 우리의 과거사라 생각된다.

 

인천 짠물, 어디선가 많이 듣던 이야기다. 군대에서나 직장에서나 사람들이 모여 생활하는 곳이면 나오던 그 말, 이것마저도 자부심을 가져야 할 말인 것 같다.

 

만석동에 더 가깝다고 풀이함이 나을 성 싶은 지역, 고가교를 넘어서며 나타나는 제물량길 끝에서 이어지는 만해길과 어촌길 한 편, 애석하게도 북성지구에 편입되긴 했어도 애환이 서린 곳이 이곳이다. 철도 부지에 속해 개발도 되지 못하고 버려진 땅, 이곳이 근대사에 아픔을 가진 곳이라면 누가 믿을까.

 

1883년부터 1914년까지 외국인 특정 거주지역으로 분할될 당시 일인과 청국인은 자기들만의 묘지를 가졌지만, 서양인은 각국 지계(地界)에서 특권적인 생활을 할 때 그들의 묘지 자리가 바로 이곳이었다면 누군들 믿겠는가.

 

그 시절 전하는 바로는 묘지라기보다는 아름다운 소공원이라 해도 좋았던 곳이기도 했다고 전하나 지금은 흔적도 없는 불모지로 전락했으니 누구의 책임일까. 1883년에 만들어져 1914년에 각국 지계의 폐지로 없어진 묘역, 묘의 숫자는 59기, 국적별로는 11개 국의 외국인이 묻혔던 곳이다.

 

1965년까지도 있었던 외국인의 묘역. 후론 옛 송도역 부근 청학동으로 이전하였지만 역사는 거스르지 못하는 진실, 괭이부리말과 무네미 시작점에 있었던 외국인 묘지야말로 우리가 간직해야 할 문화유산이 아닐까.

 

괭이부리 말(마을)보다 반세기 앞질러 불려진 무네미골. 오늘날에 와서 고양이의 부리가 괭이부리로 되었다는 설과 괭이갈매기의 부리처럼 생겼다하여 생겼다는 등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말이 무성하여 이제 확실한 정의를 내릴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필자의 견해로는 인천 팔경의 하나로 묘도석조(描島夕照) 고양이 섬의 석양이 아름다웠다 말하는 것으로 보아 고양이 부리로 보는 것이 타당성이 있는 것 같다.

 

지금은 영종도를 가려면 연안부두나 월미도에서 배를 이용하여 갔지만(물론 인천대교, 영종대교가 생기기 전) 1950~60년대 만해도 이곳 괭이부리(만석부두)에서 승선, 영종도를 갔었던 곳이니 교통의 요지로 또 다른 풍광이 서린 곳이다. 공장과 공장사이 담 모퉁이 길로 변하여 보잘것 없는 만석부두 가는 길이 되었지만 그 시절은 흥청대던 길이었건만 변해도 엄청 변한 모습이다.

 

괭이부리 터하면 화도진 관할로 조선조 말 서해안 방어를 위해 세워진 포대로 북변에 5혈(穴)과 남변에 5혈, 합하여 10혈이 있었던 곳이며 1882년 고종 조 때는 화도진에서 한미수호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미국의 전권대사 슈벨트 제독이 처음 도착한 지점이기도 한 괭이부리. 왜 이리 황량하기만 한지 바람도 그 영문을 모르겠다 할밖에.

 

한창 어려운 동란 이후 대미원조 곡물이 이곳으로 도착 하역작업이 이루어진 곳 또한 만석부두고 일제가 약탈한 곡식이 만석이 쌓여 있어 만석동 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곳이 풀 죽어 있는 현상 아무도 모르는 일 바람인 들 알겠나. 그래서 생긴 “인천에 가면 굶어죽지 않는다”는 말이 남한 팔도에 떠도는 것이 빈말이 아니었다.

 

하역장 가대기(등짐을 지는 말)라도 하면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한다는데서 기인한 말이지만 살 수 있다는 말, 연명하며 훗날을 기약한다는 말로 바꾸어 풀어봄직 하다면 얼마나 희망이 넘치는 곳이 될까. 이래서 인천은 희망이 꽉 찬 곳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시인·인천서예협회 고문

이인수 기자 yis6223@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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