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수의 인천얘기 3 - 개항장(開港場)

2020.10.13 13:55:13 15면

 

이인수의 인천얘기 3 - 개항장(開港場)①

 

 다시 개항장(開港場)이다. 인천 중구 옛 개항장 일대가 주목받고 있다.

 

이곳은 9월 정부가 주관하는 ‘스마트관광도시 시범조성 공모사업’ 최종사업지로 선정됐다. 관광객이 많은 특정구역이나 거리를 대상으로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AI), 증강현실(AI), 가상현실(VR), 5세대 이동통신(5G) 등 첨단기술을 접목해 새로운 차원의 관광지를 만들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이다.

 

시는 곧바로 한국관광공사와 업무협약을 맺고, 기획보도자료를 내는 등 사업추진을 위해 발빠른 행보에 나섰다. 내년 4월까지 국비 35억 원 등 모두 88억 원을 들여 ‘스마트한 19세기 제물포 구현’의 주제에 맞게 관련 인프라와 콘텐츠를 구축할 계획이다.

 

주지하다시피 인천의 근·현대사는 1883년 개항과 함께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랜 기간 내륙도시였던 인천은 이 때를 기점으로 권부(權府)의 중심이 현재의 중구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해양도시로 성장해왔다.

 

사전적 의미로 개항장은 외국인의 정박·접대·무역처로서의 기능을 발휘하는 항구를, 근대 이후로는 국제조약에 따라 개방된 항구를 지칭한다. 외국인거류지(租界)와 감리서(監理署)가 설치되고, 외교관이 주재하며 출입외화(出入外貨)의 관세 수입처가 된다.

 

1800년대 중·후반기에 주로 이뤄진 한국와 중국, 일본 동아시아 3국의 개항은 자발적이 아닌 외세에 의한 강제적 개항이었다는 비극적 역사를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고려 때의 벽란도나, 교과서에서 ‘1510년 삼포왜란(三浦倭亂)’으로 익숙한 조선시대 부산포·내이포·염포와는 그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

 

개항으로 문호가 활짝 열린 인천의 모습을 누군가는 이렇게 표현했다. ‘어느날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조약을 맺어 바닷가 한편이 열리면서 모든게 송두리째 바뀌기 시작했다. 행정기능이 옮겨가고, 거주지가 새로 생기면서 제물포가 인천의 중심이 됐다. 이방인의 짐 보따리와 함께 듣도 보도 못한 문화와 물화가 밀려들어왔다. 개방은 혼돈이었고 개벽이었다.’ 그랬다. 당시 사람들에게 개항은 하늘이 다시 열린다는 ‘개벽’ 만큼이나 어지럽고 경천동지(警天動地)할 일이었다.

 

인천은 단번에 국제도시가 됐다. 생전 처음 보는, 무쇠로 만든 큰 배들과 함께 외국인들이 드나들고 이들만이 살 수 있는 조계가 설정되고 낯선 주택과 상점, 은행 등 서양식 건물들(洋館)이 시내 곳곳에 들어섰다. 영사관(일본·청·영국·러시아)이 설치되고 ‘국내 최초’의 수식어가 함께하는 각종 시설들-공원, 호텔, 철도, 등대, 해관(세관), 기상대, 미두취인소 등-이 잇따라 등장하면서 시민들의 벌어진 입은 다물어질 겨를이 없었다.

 

다양한 군상의 인간들이 세계는 물론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었다. 일본인, 청국인, 독일인, 러시아인, 영국인, 미국인에서부터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평안도 사람 등에 이르기까지. 공무(公務)를 위해, 일자리를 찾아 먹고 살고자, 미두에서의 일확천금을 노리고, 별장에서의 편안한 휴식을 위해, 기생과의 하룻밤이라는 달콤한 꿈에 젖어... ‘국제도시’ 인천에 오는 사람들의 목적은 이처럼 저마다 달랐다.

 

또 많은 이들은 보고, 먹고, 마시고, 즐기기 위해 즉 ‘구경’하기 위해 인천을 오갔다. 난생 처음인 이국적 시설과 음식, 공연장 등은 사람들을 끌어들였고 사람들이 몰릴수록 즐길거리는 더욱 늘어났다. 인천의 거리 곳곳은 늘 이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뤘다.

 

개항장 인천의 구경거리는 무궁무진했으나 특히 월미도와 각국공원(현 자유공원)의 인기가 높았다. 수목이 어우러진 경관에 해수풀장, 조탕(潮湯), 용궁각, 빈호텔 등을 갖춘 월미도는 1917년 방파제가 완공된 전·후 한동안 인천은 물론 전국적으로도 손 꼽히는 관광명승지요 연인들의 밀애처이고, 학생들의 단골 소풍장소였다. 1888년 러시아인 토목기사 사바틴에 의해 응봉산 정상에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원으로 인천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각국공원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렇듯 인천은 개항 이후 오랜 기간 천지개벽의 변화가 이어지면서 나라 안팎에서 가장 주목 받는 도시였다. 아무튼, 겉으로 드러난 외형은 그랬다. 그 위상에 걸맞게 수 많은 근대 문학작품 속에 그려진 이 시기 인천의 모습은 무척 많고도 다양하다.

 

염상섭(廉想涉)의 소설 ‘이심(二心)’에 나오는 내용을 소개하며 1편을 마무리한다. 작품이 나온 시기와 상황으로 미뤄 시대적 배경은 1920년대 어느쯤일게다.

 

‘인천 하면 떠오르는 것은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도시라는 점이다.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바다를 볼 수 있는 낭만의 도시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도시의 출입구인 인천역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인다. 특히 인천역에서 조금 올라가면 경관 좋은 만국공원과 중국인 마을이 있기에 사람들의 발길에는 즐거움이 넘친다.

정거장에는 오후가 되어도 인천 가는 사람으로 붐비었다. 하루 열두 서너 번의 정기발차 외에도 임시열차를 틈틈이 내보내었건만 남녀학교의 원족겸 군함견학단이 아침부터 줄로 친 듯이 내려갔고, 오후에는 올라오는 학생단체와 바꾸어서 연주대회 구경가는 사람들, 놀이삼아 조탕에 가는 사람들... (중략) ...자동차는 사람이 장날 같이 복작대는 해안을 한 바퀴 돌아서 만국공원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러나 오늘은 여기도 사람의 떼로 우글거린다. 중등학생의 떼며 여학생들의 행렬도 앞에 보인다. 아마 이 학생들도 음악회 구경하느라고 몰려 들어오는 모양이다.’/ 인천본사 편집국장

이인수 기자 yis6223@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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