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균의 재미있는 인천 3 - 동일방직과 서정익

2020.10.20 09:09:18 15면

 동일방직과 서정익

 

 응봉산 뒤편과 화도진 언덕에서 흘러 내려와 멈춘 것 같은 만석동은 소담하게 가라 앉은 형국이다.

조용한 평야처럼 몸부림칠 줄도 모르는 땅. 그 땅에 1980년대 전에는 아파트라고 눈 씻고 찿아볼 수 없었으나, 도시생태의 변화 속에서 저층이긴 하지만 만석동에도 아파트가 비로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꼬방동네에 큰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그 변화 속에서도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기업이 있다. 주거환경 개선으로 이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공장이라면 만석동은 늦게 개발되고 있는 것일까. 수난의 시대부터 해방공간을 넘어 현재까지 가정 수입의 일조를 해온 기업으로 어머니 여공들이 많은 동일방직(창립 당시 동양방적) 이다.

 

러일전쟁 당시(1905년) 인천항의 주요 수출품은 피혁, 해산물을 빼고는 곡물뿐이었고 석유, 석탄, 설탕 등은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면포(綿布)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을 본다면 방직 가공업이 성황을 이뤘음을 알 수 있다.

 

광목이라 하면 폭이 큰 목 섬유를 말하는 것으로, 광목장사(주로 淸 상인)들의 장사속이 꽤나 짭짤해 쌀 40가마가 광목 1통이라는 시세를 가지고 있을 그 때 광목값이 요새 말로 한다면 금 값 아니겠는가.

 

1934년 해변 매립지 무네미에 동양방적이 세워져 전국에서 제일가는 방적계의 일인자 기업으로 성장한 것이 오늘의 동양방직이다. 그 시절에는 보통학교를 마친 여자는 서울 유학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로 이 방적회사에 많이 입사하게 된다. 기숙사 시설을 갖추고 있었던 동양방적은 보통학교 졸업자를 입사조건으로 제시, 인천에 많은 정미소나 성냥공장보다 임금도 좋았지만 월등한 학력을 가진 여공들이라는 것이 정평이 나 있었다.

 

이 방적회사는 흰 저고리에 구두를 신고 검은 치마를 유니폼으로 택한 것은 아마도 민족의식과 어떤 저항의식의 소산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곳을 다니고 있거나 출신자들은 동대(東大)라고 할 정도로 자부심 또한 대단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차피 흘러간 이야기지만 1960년대까지도 있었던 요리집, ‘인천원’ 여사장이나 지금의 기억으로 프로복서 ‘서강일’의 장모이며, 60중반을 넘긴 인천 토박이이면 모를 리 없는 신포동의 ‘염염집’ 주인 마담(?) 역시 동대 출신으로 족적을 남긴 사람들이다. 더군다나 욕쟁이 염염집 여사장은 기숙사 사감을 역임, 동일방직이 남긴 여자 대장부 걸물이었다.

설립자 서정익은 1910년생으로 국가에 이바지한다는 일념으로 기업을 창립, 운영한 공적이 지대함은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 조부(서정빈)는 교육사업에 뜻을 두고 신문학과 영어를 가르치는 ‘제녕학원’을 설립해 오늘날의 동명초교를 일궜으며 서정익의 아호를 따 만든 ‘정헌장학회’는 현재까지도 운영되고 있어 귀감이 아닐 수 없다.

 

국내 면방업계에서 으뜸이랄 수 있는 동일방직은 1946년에 노조가 결성돼 여성 노동사에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다. 노동조합 여성 지부장을 탄생시킨 전무후무한 일도 그 한 예이다.

 

22대 ‘주길자’ 지부장이 나오며 연이어 23대 ‘이영숙’ 지부장이 당선되는 노조의 대립은 남성 우월주의에 의한 노조 문제로 비화 1975, 76년은 평탄치 못한 노사정의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지부장의 구속, 석방 농성, 징계처분 및 해고, 복직 투쟁 등 끝이 없는 쟁의는 1976년 7월25일 오후 공권력투입까지 이르게 되었다. 강압적인 해산이 낳은 큰일은 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강제해산을 강력히 거부하기 위해 일제히 상의 작업복을 벗어 흔들며 저항했다. 초복의 여름날 여공들은 브래지어만 걸친 반나체의 농성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로 1970년대 민주노동운동의 면면상 이다. 무자비한 강제해산이 가지고 온 결과는 그 시절을 잘 대변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수 년을 걸친 동일방직의 사례는 성숙의 노동운동으로 평가되며 노동사에 밑거름으로 남았다.

 

지금의 동일방직은 바쁘게 오가는 사람도 없이 쓸쓸하기 이를 데 없다. 기억의 창고 속에서 사라져 가는 것은 아닐까.

 

묻혀가는 한 지역의 역사를 되돌릴 순 없으나 그 땅은 새로운 역사를 준비하고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시인·인천서예협회 고문

이인수 기자 yis6223@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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