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수의 인천얘기 4-개항장<2>

2020.10.27 13:00:51 15면

국제도시의 화려함 뒤에 인천부민들의 비참한 삶 존재
우리 땅에서 청.일본인들에 차별, 억압, 멸시당한 아픔
외세, 특히 일본에 의해 철저히 계획화된 도시

 

 개항(開港), 그 것이 자의적이었든 외세의 강압에 의해서였든 오늘날 인천의 모습이 태동한 맹아(萌芽)였음은 분명하다. 137년 전 한적했던 어촌의 문이 느닷없이 열리면서 시작된 도도한 역사의 물결은 숱한 굴곡을 이리저리 넘고 돌아 오늘에까지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그러나 개항이 가져온 화려함 뒤에는 내 땅에서 오히려 억압당하고, 착취당하고, 천대당해야 했던 인천부민(府民)들의 비참한 삶이 있었다. ‘국제도시’ 인천, 거기에 인천사람들은 없었다. 주인공은 정작 따로 있었다.

 

‘인천 제물포 모두 살기 좋아도/ 왜인 위세로 난 못 살겠네 흥/ 에구 대구 흥/ 단 둘이만 사자나/ 에구 대구 흥 셩하로다 흥/ 아라랑 아라랑 아라리오/ 아라랑 알션 아라리아...’  1894년 일본 도쿄의 박문관이 펴낸 홍석현(洪錫鉉)의 ‘신찬조선회화(新撰朝鮮會話)’에 수록된 ‘인천아리랑’의 한 소절이다.

 

한참 동안 존재조차 모르고 있다가 인천 출신 국문학자 허경진에 의해 발굴, 소개되면서 알려진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인천의 부두노동자들이 불렀던 노동요이자 항일민요 성격의 노래로, 당시 인천에 있던 일본인들의 등쌀이 얼마나 무지막지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오죽했으면 못 살겠다는 말이 나왔겠는가.

 

개항이 되자 모습도, 말도 낯선 외국인들이 물밀듯 몰려들었다. 이들은 먼저 자신들의 안거지(安居地)부터 정했다. 조선 정부와 협약을 맺고 조계(租界)를 만들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일본전관조계, 청국전관조계, 각국공동조계다. 지금의 중구청을 중심으로 주변 15만여 평에 달하는 광대한 노른자위 땅이 한 순간에 감히 범접해서는 안 되는 ‘나라 안의 외국’이 돼버렸다.

 

개항 이후 인천에 정착하는 일본인들의 숫자는 해마다 늘어났다. 특히 임오군란 이후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앞세워 10여 년 간 조선을 지배하다시피 한 청나라의 위세가 크게 꺾인 청일전쟁을 계기로 두드러졌다. 자기 나라보다 살기 좋고, 돈 벌기 쉽고, 어수룩한 조선인들 부리기 편한 인천에 오기 위해 현해탄을 건너는 발길이 급증했다. 대부분이 본국에서도 찬 밥 신세였던 부랑아, 사기 등 각종 범죄자, 도시빈민, 농민, 일확천금주의 몽상가들이었다.

 

이렇게 되자 처음 설정했던 조계가 비좁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조계는 물론 각국공동조계를 넘어 이들의 거주지가 밖으로, 밖으로 확장되면서 그곳에 살던 인천부민들은 하루아침에 쫓겨나야 했다. 자유공원 너머 지금의 인현동, 전동, 송현동, 송림동, 싸리재, 창영동, 도원동... 당시만 해도 몇몇 지역은 인적이 드물어 대낮에도 강도, 살인 등 흉포한 사건이 빈번했던 곳이었다.

 

월간지 ‘개벽’은 1924년 8월호 ‘인천아 너는 엇더한 도시인가’ 제하의 글에서 일본인 거주지의 무차별적인 확장과 이에 따라 변두리로 밀려 나는 원주민들의 비애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개항 초기부터 인천에 진출한 외국인들-특히 청과 일본-이 가장 힘을 쏟은 것은 ‘상권 장악’이었다. 수 많은 단체와 협회, 조직을 만들면서 피 튀기는 경쟁을 펼쳤다. 지금 중구청 앞에 당시 모습이 잘 보존돼 있는 일본 제1은행, 제18은행, 제58은행도 그 흔적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이 역시 전쟁에서 청나라가 참패한 1895년부터 일본의 우위가 확실해지기 시작했고, 이후 조직적인 침탈이 본격화했다.

 

막대한 자금력과 조직, 최신 영업기법에 본국 정부의 후원까지 등에 업은 이들에게 인천부민들은 애초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일본의 악랄한 경제수탈을 상징하고 인천을 흥청망청 사치와 유흥, 도박, 투기의 도시로 전락시킨 대표적인 곳은 미두취인소(米豆取引所)다. 우리나라 증권시장의 모태이기도 한 미두취인소는 1896년 설립됐다. 외형은 쌀의 선물거래장이지만 실은 거대한 투기장이었다. 쌀의 집산지였던 인천의 미곡거래권을 장악하고 식량이 부족했던 본국으로의 반출을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 본래의 설립 목적이었다.

 

미두취인소의 ‘위험천만함’을 알리 없는 사람들이 일확천금의 소문에 이끌려 전국에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이들을 노린 여관과 음식점, 술집, 기생집들도 우후죽순 생겨났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가진 돈, 또는 전재산까지 탕진하기 일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의 병폐는 큰 사회적 문제로 대두했다.

 

‘인천의 바다는 미두로 전답을 날린 자들의 한숨으로 파인 것이요, 인천 바닷물은 그들이 흘린 눈물이 고인 것이다.’

 

동아일보의 기사는 더 참혹하다. 1939년 11월19일자에 ‘강보에 싸인 인천의 어린아이도 합백(合白, 공인받지 않은 사설 미두도박장)과 투기를 안다’고 썼다. 이광수의 소설 ‘재생’과 채만식의 희곡 ‘당랑의 전설’에도 미두에 대한 이야기가 상세히 나온다. 어둡고 파국적인 내용이다.

 

지금의 제물포고등학교, 응봉산 자락 아래 웃터골에서 우리 한용단(漢勇團)과 일본인팀 간에 야구경기가 열릴 때마다 운동장을 가득 메웠던 백의(白衣)의 부민들이 목청껏 내질렀던 함성은 켜켜히 억눌려온 ‘한의 포효’나 다름없었다.

 

이렇듯 개항 이후 인천에 들어선 모든 것-건물에서 길에 이르기까지-에는 바다 건너 온 외인(外人)들의 음흉한 모략과 야욕이 뒤섞여 스며 있다. 서로 빼앗고, 짓누르고, 죽이는 각축의 도가니장이었다. 개항장을 중심으로 ‘근대’를 접한 인천은 문을 연지 불과 10여 년 만에 일본의,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을 위한 도시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에 서서히 빠져들고 있었다.

 [ 경기신문 / 인천 = 이인수 기자 ]

이인수 기자 yis6223@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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