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수의 인천얘기 7 - 기록과 보존, 송암 선생 유물 국가문화재 지정에 부쳐

2020.12.08 13:36:32 15면

 과거 왕조시대 사초(史草)는 역사서 편찬의 가장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사료였다. 25대(태조~철종) 472년 간의 역사를 하루도 빠짐없이 써내려와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도 888책, 1894권에 달하는 그 방대한 양의 골간을 이룬 것은 사초였다.

 

사초를 기록하고 보관했던 이들이 사관(史官)이다. 조선시대 공식 직함을 부여받아 사관으로서의 업무를 전담한 관리들은 예문관 소속 봉교(奉敎)·대교(待敎)·검열(檢閱) 등 8명을 가리킨다. ‘사실과 진실’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고 권력의 유혹이나 압력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했던 사관의 선발규정은 매우 엄격했다.

 

재(才)·학(學)·식(識)의 삼장지재(三長之才)를 갖춰야 했던 것은 기본이고 본인은 물론 가족에도 흠결이 없어야 했다. 나중에 결혼했을 경우 혹 있을지도 모를 처가쪽의 문제를 고려, 미혼자들은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 사실을 사관이 알지 못하게 하라.” 사냥을 나갔던 태종이 말에서 떨어지자 황급히 상황을 수습하며 주변에 한 말이다. 그러나 태종의 바람과는 달리 그 명령은 실록에 고스란히 실려 60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생생히 전해지고 있다. 임금의 치부까지도 기록에 남긴, 사관들의 치열한 기록정신과 올곧은 자세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관들은 매일매일 기록한 사초를 집에 보관하고 있다가-이를 가장(家藏)사초라 한다-왕의 사후 실록청이 구성되면 제출한다. 가장사초에는 인물평과 사론, 기밀사항 등도 담겨 있다. 이 과정에서 권력자의 압력에 의해서든, 자신의 신변 안위를 위해서든 사초 내용을 누설, 수정, 공개하거나 멸실하면 사형, 유배 등 엄중한 벌에 처해졌다. 연산군대 사화(士禍)의 서막을 연 무오사화도 발단은 사초였다. 이 때 많은 사관들이 희생돼 무오사화는 훗날의 다른 사화와 달리 ‘사화(史禍)’로 불리기도 한다.

 

이렇듯 역사는 당대인들의 철저한 기록과 보존을 통해 면면히 이어진다. 한 국가는 물론이고 지역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나라나 사회는 당시의 역사적 가치가 있는 모든 일들을 기록하고, 민간의 기록물을 수습하고 보존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물론 사초만이 역사기록은 아니다. 그림과 시, 소설, 편지, 개인문집, 각종 공·사문서, 국가의 기록, 다양한 유물들도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훌륭한 자료다. 근대 이후에는 여기에 신문과 사진, 영상 등을 추가할 수 있겠다. 비록 사초보다는 덜하다 할 수 있지만, 역사기록으로서 이 모든 것 하나하나의 소중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지난 4일 인천이 낳은 위대한 인물 송암 박두성(朴斗星, 1888~1963) 선생 관련 유물이 국가문화재로 지정됐다. 일제의 엄혹한 상황 속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만들어 1926년 발표한 한글점자 ‘훈맹정음’ 설명서와 당시 선생이 사용했던 제판기, 점자타자기 등 관련 유물 8건·48점이다.

 

시는 1999년 미추홀구 학익동 인천시각장애인복지관 안에 송암박두성기념관을 만들어 운영해왔다. 또 2022년 개관 예정인 국립세계문자박물관에 훈맹정음 상설전시관을 마련, 선생의 업적을 해외에도 널리 알릴 예정이다. 이번 국가문화재 지정으로 유물의 보다 체계적인 보존·관리와 함께 시의 계획에도 한층 탄력이 붙을 전망이다. 매우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사물은 있어야 할 제 자리가 있다. 그래야 의미와 가치가 빛을 발한다. 이럴진대 하물며 시대적 소산인 역사문화유산이야 두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합법적이든, 비합적이든 한번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난 유물의 되돌림은 지난하다.

 

이와 관련해 인천은 아픈 기억이 있다. 인천 출신의 대서예가 검여 유희강(柳熙綱, 1911~76)과 동정 박세림(朴世霖, 1925~75)이 남긴 주옥같은 작품들은 지금 인천에 없다. 검여의 유품 등 1000여 점은 서울 성균관대 박물관, 동정의 작품은 대전대에 있다. 또 근대 한국음악사의 대가로 ‘인천을 지독하게 사랑했던’ 작곡가 겸 가요연구가 김점도씨가 소장하고 있던 가요책자 2000여 권과 유성기판 2300여 장, 레코드판 2만 여 장 등 귀중한 자료들은 지금 경기 용인시 신나라레코드 가요연구소가 보관 중이다. 오래 되지도 않았다. 불과 2~3년 전 일이다.

 

고향에 남기고자 했던 유족들이나 본인의 간절한 바람을 외면한, 당국과 지역사회의 무관심이 빚어낸 ‘참사’였다. 여기저기서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시는 2019년 9월 ‘인천 문화관광체육분야 2030 미래이음설명회’를 열고 제2의 검여·동정사태 재발을 약속했다.

 

이후 시가 역사문화유산의 발굴 및 보존에 전과는 다른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반가운 일이나 조금 보폭을 넓힐 필요가 있을듯 싶다. 우리 주변에는 인천과 관련해 귀중하고 다양한 자료-사진, 서화, 일기, 서한, 신문, 도서 등-를 직접 기록하거나 수집·소장하고 있는 분들이 많다. 현대판 사관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굳이 역사서를 엮지 않더라고 그 자체가 훌륭한 역사다.

 

눈에 보이는 근대 건축물 못지 않게 집안 깊숙히 보관된 이들 자료의 매입과 보존도 중요하다. 개인이 해야 하는 관리의 한계상 계승이 제대로 안 된다면 유출되거나 소실될 가능성이 높다. 소장자들 대부분은 70대 이상 고령층이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인천본사 편집국장

이인수 기자 yis6223@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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