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역사를 말하다]신라 문무왕도 투후 김일제의 후손이다

2020.12.21 06:00:00 16면

다시 쓰는 가야사⑦

 

◇바닷 속에 묻힌 신라 문무왕

 

 

신라 제30대 문무대왕(文武王:재위 661~681)은 부왕 태종무열왕의 유업을 이어 고구려까지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을 달성했다. 또한 옛 백제 및 고구려 강역을 차지하려던 당나라 군사와 나당전쟁(신당전쟁)을 치러서 옛 백제 및 고구려 강역을 신라 강역으로 포함시켰다. 이런 문무왕에 대해서는 신비로운 이야기가 많다. 그중 하나가 아들 아들인 신문대왕이 부친을 위해 세웠다는 동해 바닷가의 감은사(感恩寺)다. 《삼국유사》 〈만파식적(萬波息笛)〉에 나오는 이야기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려고 이 절을 짓기 시작했는데, 끝마치지 못하고 붕어(崩御)해서 해룡(海龍)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개요(開耀) 2년(682)에 끝마쳤다. 금당 섬돌 아래 동쪽으로 굴을 뚫어 열어두었는데, 용이 절에 들어와서 둘러싸게 하기 위해서였다. 대개 유조(遺詔:황제의 유언)로써 유골을 간직한 곳의 이름을 대왕암이라고 하고, 절을 감은사라고 했으며, 후에 용이 나타나는 형상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고 했다(《삼국유사》)”

 

《삼국사기》는 문무왕이 세상을 떠나자 “여러 신하들이 유언에 따라서 동해 입구의 큰 바위 위에서 장례를 치렀는데, 세속에서 왕이 변해 용이 되었다고 한다”고 적고 있다. 문무왕의 릉(陵)은 땅속이 아니라 바다속인 수중릉(水中陵)인데, 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 바다를 문무왕 수중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럼 문무왕의 비문을 어디에 세웠을까?

 

◇신라 왕실은 투후 김일제의 자손이다.

 

 

문무왕 릉비(陵碑)는 파란만장한 유전(流傳)을 겪었다. 신문왕 때 세운 이 릉비는 약 1천여 년 후인 조선 정조 20년(1796년) 우연히 발견되었다. 정조 때 홍문관·예문관의 양관(兩館) 대제학을 지낸 홍양호(洪良浩:1724~1802)의 문집인 《이계집(耳溪集)》에는 〈신라 문무왕릉비에 제하다(題新羅文武王陵碑)〉라는 글이 있다. 이 글에서 홍양호는 문무왕 수중릉에 대해 현지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하면서 이 비를 발견한 이야기를 적고 있다. 현지 사람이 밭을 갈다가 홀연히 들판에서 발견한 고비(古碑)가 문무왕릉비라는 것이다. 그 후 이 비는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그 탁본 네 장이 청나라의 금석학자 유희해(劉喜海)에게 들어가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실렸다. 그는 네 장의 탁본을 각각 제1, 2, 3, 4석으로 호칭했는데, 이는 그가 4개의 비편(碑片)을 보았음을 의미한다. 또한 1961년에는 경주시 동부동 주택에서 비편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정조 때인 1796년에 발견되었던 비신의 하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비문 앞면의 5행에 신라 김씨 왕실의 선조에 대한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

 

「(5행)···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화관지후(火官之后)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높이 세워져 바야흐로 융성하니, 이로부터 □지(枝)가 영이함을 담아낼 수 있었다.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하였다.」

 

‘투후 제천지윤’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투후의 후손”이란 뜻인데, 투후는 휴도왕(휴저왕)의 태자로서 한나라에 끌려갔던 김일제가 죽기 직전 한나라에서 받은 제후의 이름이다. 신라 문무왕은 성이 김씨이고 이름은 법민(法敏)인데, 그가 김일제의 후손이기 때문에 성이 김씨라는 것이다. 게다가 문무왕의 어머니는 김유신의 동생인 문명왕후, 즉 김문희였다. 아버지도 김씨고, 어머니도 김씨다.

흉노 휴도왕의 태자로서 한나라 궁중에서 말을 키우던 김일제는 무제가 말을 사열할 때 다른 마부들이 모두 후궁들을 힐끗거리는데 비해서 눈길도 주지 않아서 무제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본격적인 벼슬길에 들어섰다. 무제는 김일제를 크게 총애했고, 그의 아들들까지 사랑해서 주위에서 “폐하가 망령이 들어 오랑캐 새끼를 귀중하게 여긴다”고 수군거릴 정도였다. 김일제는 맏아들 농아(弄兒)가 궁녀와 통간(通姦)하자 스스로 아들을 베어 죽일 정도로 엄격하게 처신했다.

 

◇망하라의 무제 암살 기도를 막은 김일제

 

 

이 무렵 중합후(重合侯) 마통(馬通)의 큰형인 시중복야(侍中僕射) 마하라(馬何羅)라는 인물이 김일제의 인생에 중요하게 등장한다. 무제는 위황후(衛皇后)에게서 낳은 류거(劉據)를 태자로 삼았다. 무제는 만년에 혹리(酷吏)였던 강충(江充)을 중용했는데 강충은 태자 류거와 사이가 나빴다. 무제가 예순여섯 살 때인 정화(征和) 2년(서기전 91) 강충은 태자가 무제를 저주한다고 무고했다. 태자도 강충이 모반한다고 맞섰다. 강충은 환관 소문(蘇文)을 무제에게 보내 태자를 참소하자 무제는 사자를 보내 태자를 소환했다. 그러나 사자는 태자의 처소에 가지도 않고, “태자가 모반했으며 신의 목을 베려고 해서 도주했습니다.”라고 허위보고했다. 무제는 크게 노해서 승상(丞相) 류굴리(劉屈氂)에게 태자를 진압하라고 지시했다. 태자도 수만 군사를 동원해 맞섰는데, 닷새 동안의 격전 중에 사망자만 수만 명이었다. 태자는 결국 민가로 도주했다가 자결했는데, 이 사건을 남을 저주했다는 뜻의 ‘무고(巫蠱)의 변’이라고 한다. 태자를 죽음으로 몬 강충의 운명도 순탄치 못했다. 무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태자 류거가 모반할 생각이 없었음을 알고 크게 후회해서 강충과 그 삼족을 모두 죽였다.

평소에 마하라는 강충과 사이가 좋았다. 마하라 형제는 흉노인이었다가 한나라로 투항했는데, 강충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겪는 것을 보고 동생 마통과 무제를 제거하려 했다. 서기전 88년 마하라는 기회를 엿보다가 무제가 임광궁(林光宮)에 갔을 때 조서를 위조해 사자를 죽이고 군사를 동원하려 했는데, 때 마침 김일제에게 발각되어 되레 죽임을 당했다. 이때 명제(明帝)의 황후였던 명덕태후 마씨는 마하라·마통 형제가 마씨인 것에 분개해 그 성을 ‘망(莽)’으로 바꾸게 했고, 이후 마하라는 역사서에 ‘망하라(莽何羅)’라고 쓰이게 되었다.

무제는 망하라의 난을 평정한 당시에는 김일제에게 상을 주지 않고 있다가 죽을 때 밀봉한 새서(璽書)를 내려서 “황제가 죽으면 이 서한에 따라서 일을 처리하라”고 명했는데, 유조(遺詔)는 김일제는 투후(秺侯)로 봉하라는 것이었다. 김성(金姓)도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지냈다는 이유로 무제가 하사한 성씨였다. 그러나 김일제는 황제 소제(昭帝)가 어리다면서 제후의 지위를 사양했는데, 김일제가 몸져눕자 소제는 곽광과 의논해 작위를 다시 내렸다. 김일제가 작위를 받은 후 하루 만에 죽자 소제는 장례 물품과 무제의 무덤인 무릉(茂陵) 곁의 장지를 내렸고, 경후(敬侯)라는 시호를 내렸다. 투후 작위는 아들 김상(金賞)이 이었다.

 

◇재당신라인들도 김일제의 후손

 

1954년 중국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 동쪽 교외 곽가탄(郭家灘)에서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이 발견되었다. 김씨는 재당 신라인 김공량(金公亮)의 딸이자 김충의(金忠義)의 손녀인데, 함통 5년(서기 864) 5월 29일 향년 32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는데, 묘지명에 선조들이 적혀 있다.

 

“태상천자 때 나라가 편안했는데, 그 적장자께서 가문을 여셨는데 호(號)가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이시니 곧 우리 가문이 씨(氏)를 받은 세조(世祖)이시다. 그 후에 종파가 갈라지고 갈래가 나뉘어 번창함이 있고, 빛남이 있어서 천하에 만연하니 많고도 많도다. 먼 조상 이름은 일제(日磾)이신데 흉노 조정〔龍庭〕에서 서한(西漢)에 귀순하셔서 무제(武帝)에게 벼슬하셨다. 명예와 절개를 삼가니 시중(侍中)과 상시(常侍)에 발탁하고 투정후(秺亭侯)에 봉하셨다.”

 

재당 신라인들이 자신들의 선조를 소호 김천씨와 김일제로 여겼다는 이야기다. 〈김유신 비문〉에 자신들을 소호 김천씨의 후예로서 남가야 시조와 같다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 맥락이다. 한국 강단사학자들은 이를 신라인들이 후대에 만든 관념이라고 아무런 근거 없이 주장하고 있다. 신라 김씨나 가락 김씨는 소호 김천씨의 후예이자 김일제의 후예라는 것이 문헌사료 뿐만 아니라 여러 금석문에서도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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