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일고 있는 한국 열풍
2018년 7월 문재인 대통령은 인도를 방문하기 전 현지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양국 교류의 역사는 2000년에 이른다”며 “한반도 고대 왕국인 가야국의 김수로왕과 결혼해 허황후가 된 아유타국 공주에서 시작된 인연은 60여년 전 한국전에 참전한 인도 의료부대까지 이어졌다”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문대통령을 크게 환대했고, 문대통령이 인도 거주 교포 초청 간담회를 할 때 인도 전통의 ‘카탁’ 무용단을 보내 수로왕과 허황후를 주제로 한 공연을 하도록 했다. 인도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허황후가 2천여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15억 인도인과 5천만 한국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인도에서는 한국인 여행자들을 사돈나라에서 왔다고 크게 환대한다는 이야기를 쉽게 접할 수 있다. 과거 역사가 후세 세대에 어떤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말해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은 국내 강단 사학계에 오면 아주 달라진다. 문재인 대통령은 인도 방문 1년 전인 2017년 6월 1일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국정과제에 가야사 연구와 복원을 지시했고, 그 일환으로 2019년 12월 3일부터 국립중앙박물관(국박)에서 ‘가야본성’이라는 가야전시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가야본성’은 마치 일본극우파들의 ‘임나일본부설’ 선전장처럼 꾸려졌다. 가야계가 일본 열도에 진출해서 야마토왜(大和倭)의 역사가 시작되었는데도 거꾸로 야마토왜가 가야를 점령해서 ‘임나’를 설치한 것처럼 호도했던 것이다. 원래 이 전시는 국박을 거쳐 부산박물관(4월 1일~5월 31일)을 거쳐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7월 6일~9월 6일)과 큐슈국립박물관(10월 12일~12월 6일)까지 가서 전시할 예정이었지만 비난 여론이 들끓으면서 부산전시는 예정보다 늦은 5월 6일 개막해 한 달도 못 채우고 부랴부랴 문을 막을 내렸고, 일본 전시는 포기했다. 국박 측은 코로나 19 때문이라고 변명했지만 임나일본부설 선전장으로 변질시킨 데 대한 거센 비난 때문이었다. 국박의 ‘가야본성’ 전시 초기에 일본의 황국사관(皇國史觀)을 추종하는 한국의 강단사학계를 대변해서 《조선일보(2019. 12. 6)》와 《한겨레신문(2019. 12.8)》이 동시에 “검증 안 된 유물을 전시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두 신문은 공통적으로 비판한 ‘검증 안 된 유물’은 두 개였는데, 하나는 경북고령에서 나온 토제(土製) ‘흙방울’이고, 다른 하나는 ‘파사석탑’이었다. 흙방울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오는 가야 건국사화를 담고 있었고, 파사석탑은 허황후가 아유타국에서 싣고 왔다는 유물로서 2천여년 전 수로왕과 허황후가 혼인했다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내용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유물이었다. 즉 두 유물은 가야가 서기 42년에 건국했고, 허황후가 서기 48년에 아유타국에서 가야에 왔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유물이었다. 《조선일보》·《한겨레》의 연합공세에 국박은 토제 ‘흙방울’을 치워버리고, 파사석탑에는 ‘신화’라는 딱지를 갖다 붙여 믿지 못할 이야기로 전락시켰다. 인도 언론과 인터뷰에서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결혼을 근거로 “양국 교류의 역사는 2000년에 이른다”고 말한 문대통령을 실없는 인물로 격하시킨 것이다.
◇고려 때 문인이 쓴 《가락국기》
《조선일보》와 《한겨레》가 토제 ‘흙방울’과 ‘파사석탑’을 동시에 저격한 이유는 가야는 3세기나 되어야 건국했다는 남한 강단사학의 견해를 추종했기 때문이다. 남한 강단사학의 견해는 야마토왜를 세상의 중심으로 보는 일본 황국사관(皇國史觀)을 그대로 추종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지 않다면 가야가 1세기에 건국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토제 ‘흙방울’과 ‘파사석탑’이 그토록 저주의 대상이 될 이유가 없다. 물론 가야가 서기 42년 건국되었고, 허황후가 서기 48년 수로왕과 혼인했다는 사실은 검증이 필요하다. 역사 사실의 검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문헌사료에 대한 검토이고, 다른 하나는 관련 유적, 유물에 대한 검토이다.
먼저 허황후 이야기가 실려 있는 문헌사료는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이다. 일연선사는 〈가락국기〉가 어떤 사료인지 설명을 달았다. “문묘조(文庙朝) 대강(大康) 연간에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로 있던 문인이 쓴 것을 간략하게 싣는다”는 설명이다. 문묘는 고려 11대 왕 문종(文宗)인데 재위기간은 서기 1046~1083년이다. 대강이란 요(遼)나라 도종(道宗)의 연호로 1075~1085년 사이를 뜻한다. 문종 재위기간과 대강이란 연호가 겹치는 기간은 1075~1083년 사이이다. 이때 현재 김해인 금관(金官)의 지주사(知州事)로 있던 문인이 《가락국기》를 썼는데, 그 내용을 요약해서 《삼국유사》에 〈가락국기〉로 실었다는 것이다. 이 문인이 김해에서 벼슬하면서 가야에 관한 각종 사료를 종합해서 《가락국기》를 썼겠지만 현재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연이 이런 설명까지 붙인 〈가락국기〉를 가짜로 창작했다고 볼 수는 없다. 물론 일본 제국주의 황국사관과 그를 추종하는 남한 강단사학은 예외다. 일연은 《위서(魏書)》와 《고기(古記)》를 인용해 단군사화(檀君史話)를 전했는데, 《위서》와 《고기》가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을 빌미로 단군사화를 가짜로 모는 방식을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도 그대로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 자세한 《삼국유사》 〈가락국기〉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고대 역사사료치고는 그 내용이 아주 구체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무엇보다 연월을 물론 날짜까지 나온다. 가야 6국을 세우는 여섯 알이 김해의 구지봉에 나타난 날에 대해 “후한(後漢) 세조(世祖) 광무제(光㱏帝) 건원(建㱏) 18년(42) 임인(壬寅) 3월 계욕일(禊浴日)”이라고 썼다. 3월 계욕일이란 60갑자라고도 불리는 간지(干支) 중에서 첫 번째 사(巳)자가 들어가는 사일(巳日)을 뜻하는데, 이날 액을 덜기 막기 목욕하고 물가에서 술 마시는 것을 계욕(禊浴)이라고 한다. 계(禊)는 봄, 가을에 강가에서 거행하는 제사인 계제(禊祭)를 뜻한다. 서기 42년 3월 계욕일이라고 날짜까지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로왕은 즉위 이듬해(43) 궁궐을 신축하는데, “널리 나라 안의 장정·인부·공장(工匠)들을 불러 모아 그달(정월) 20일에 성곽일을 시작해서 3월 10일에 끝났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공사를 시작한 날과 끝낸 날을 정확하게 적고 있다. 허황후 기사도 마찬가지다. 날짜뿐만 아니라 지명이나 인명까지 아주 구체적이다.
「건무(建武) 24년 무신(48) 7월 27일에 구간(九干) 등이 조회할 때 아뢰었다.
“대왕이 강림하신 후로 아직 좋은 배필을 얻지 못하셨습니다. 신들의 집에 있는 처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골라 궁중에 들여보내 항려(伉儷:부부)가 되기를 청합니다.”
왕은 말했다.
“짐이 여기에 내려온 것은 천명(天命)이었으니 짐에게 짝을 지어 왕후(王后)로 삼는 것도 역시 천명일 것이다. 경들은 염려하지 말라”
드디어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하여 가벼운 배와 빠른 말을 가지고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서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乘岾)으로 가게 했다. 갑자기 바다 서남쪽에서 붉은 색의 돛과 붉은 기를 단 배 한 척이 북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망산도 위에서 횃불을 올리니 곧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뛰어왔다. 신귀간은 이것을 보고 대궐로 달려와서 그것을 아뢰니 왕이 기뻐했다(《삼국유사》 〈가락국기〉)」
이 기사는 서기 48년 7월 27일이라고 날짜를 정확하게 적고 있다. 일연은 이 기록의 망산도에 “서울 남쪽 섬이고, 승점은 연하(輦下)의 나라다”라고 주석을 달았다. 망산도는 가락국 수도 김해의 남쪽에 있는 섬이라는 뜻이고, 승점은 연하(輦下), 곧 임금이 타는 수레의 아래를 뜻하는 것으로 임금이 직접 다스리는 경기(京畿)를 뜻한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이처럼 날짜까지 적고 구체적인 인물들(유천간, 신귀간)과 구체적인 장소(망산도, 승점)까지 모두 기록한 특이한 사료이다. 이런 사료에 수로왕과 허황후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실려 있는 것이다.